종교

[스크랩] 예수십자가형 사건은 기획된 연극이다. 세계최초 주장

청 송 2014. 5. 18. 19:03

이번에는 예수 십자가형 사건에 대한 그 ‘2번째 이야기’~

 

즉, ‘예수 십자가형 사건은 하나의 각본에 의한 연극이다.’

라는 관점 아래,

이 지구행성의 전 세계 인류에게 알리는 사상 초유의 글임을 본 저자는 먼저 전언코자함이다.

 

이 글은 종교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단지 이치를 따져, 합리성을 찾아가는 ‘첨단의 과학 이야기’입니다.

즉, 인류가 오늘날까지 인지해 왔던 ‘종교란 것’은 결코 신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과학에 불과하다’는 관점을 인류에게 말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과학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고대 원시인들의 입장’

이러한 ‘종교 문헌상에 나오는 기적들’을 단지 ‘신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이 글이 다소 '무서운 글'이기 땜에 삭제는 하지 마시고요. 나쁜 글은 아니죠.^^

본 저자는 ‘6번에 걸쳐 기적형상을 목격’해나가던 차제에,

‘성경 등 고대 문헌’에 놀랍고도 경탄할만한 ‘고도의 과학이 밀집’돼 있음을 발견,

이제 작금의 현 시점에서는 단언컨대, ‘영생은 결코 꿈이 아니라’

‘연속적인 복제과학’을 통한 ‘과학적으로 영생하는 방법이 있음’

현재 시점에서는  완벽히 정립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하였는바

현재 이를 전 세계에 알림은 나 자신의 ‘숙명적 인연’이라 여기고 있다.

 

그와 같은 관점 하에서 이번에 전격 공개코자하는 ‘예수 십자가형 사건’

단지 ‘하나의 각본’에 의해 진행된 ‘연극과 같은 사건’임을 명확히 밝혀 나가는 장을

마련해 보고자 한다.

그것은 곧, 반드시 ‘여러 확정된 증거자료’를 통해서만이 올바른 정론이 될 것임을

거듭 밝히는 바이다.

이러한 전반적 체계는 물론 ‘성경, 불교경전 등 고대 경전의 확증된 증거자료를

토대로’ 설명되어져야 하는 바.

그 이유는 수천 년 전의 태고 적에 기록된 성경, 코란, 불교경전 등이

 ‘서로가 똑같은 내용의 과학들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고대의 원시인들 입장에서는 당연히 ‘이러한 초과학을 이해하지 못해’,

 ‘기적이니. 이적이니, 불가사의’이니 하면서 신성시 할 수 있음은 당연시된다.

 

인류역사에서 ‘예수 십자가형 사건’ 만큼이나 그렇게도 많이 인구에 회자되며

큰 난맥상의 딜레마로 떠오르는 경우도 아마 없을 것이다.

 

‘희대의 최고 미스터리적 사건’‘예수 십자가형 사건’

이제 본 저자는 이 ‘지구행성’이라는 다소 큰 증언대 위에 올려놓고서.

이 사건을 음미, 조율해 나가는 시간의 장을 마련해본다.

 

또한 ‘이 십자가형의 본질을 규명해 나간다는 것’

결국 이 ‘여호와’라는 자가 도대체 누구인지', 또한 '그 본성이 무엇인지'를

좀 더 명확하게 감지해 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척도가 됨은 타당하다.

 

‘예수’‘십자가에서 죽은 이후 되살아났다’

이 '해괴망측한 사건'에 대한 전모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해나가는 것은

결국 우리가 간직해 왔던 그 암흑의 세계를

마치 ‘해인(海印)’처럼 투명하게 비쳐지게 할 개연성은 충분하다.

 

그렇다면, 이제 ‘그 전모의 시작점’을 먼저 ‘아래와 같이 위치’시키고자 한다.

 

아래의 요한복음을 통해 예수가 ‘이미 다 알고 있는’,

‘자기를 파는 자’에 대한 '예수의 능청'을 한 번 지긋이 엿들어 보자.

 

요한 13: 18 예수 : 내가 너희 모두(12사도)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발꿈치를 들었다 고 하는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상기는 예수의 배신자로 알려져 있는 ‘가룟유다’

자기 스스로 예수를 배신한 것이 아니라,

예수가 ‘가룟유다’‘그 이전에 지명하여 선택한 것임’을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구문이다.

그리고 이후 수반되는 십자가 사건의 진행 과정은

단지 하나의 절차상의 내용에 불과함을 알아야 된다.

 

19, 지금부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알려 둠은’

    ‘일이 일어날 때’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다.’

    ‘내가 그 인줄’이라는 말은 ‘로봇으로 대체’시킬 때

     ‘그 가짜를 진짜 예수로 그대로 믿어 달라’ 라는 위대한 진실이 담겨져 있는

     아주 중요한 구절이다.

 

또한 예수의 십자가형은 ‘이미 그 이전에 그 모두가 하나의 기획된 각본임’

성경은 분명히 명시해 놓고 있다.

요한 19:28  십자가에 몸이 얹힌 후에,

                  예수가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알고

                  ‘성경에 응하게 하려’ 이르되 ‘내가 목마르다’ 하니.

시편 69:2   ‘그들이 쓸개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마시게 하였으니.

 

잠시 여기에서 이 ‘쓸개’‘신포도주’ 혹은 ‘초’가 왜 필요한지

그 용도에 관해 알아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쓸개’ ‘신포도주’ ‘초’

‘십자가형의 고통으로 죄수가 정신을 잃을 경우’에  이를 먹여서

다시 정신을 차리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십자가형 당하는 죄수가 정신을 잃게 되면 ‘고통을 못 느끼게 되니까’

‘지속적인 고통을 주기 위해서’  즉, 곧바로 정신을 차리게 하도록 하는 방법으로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쉽게 생각하면,

‘고문을 할 때 정신을 잃으면 찬물을 붓는 이치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살펴본 대로  예수는 이를 마시고 정신을 차리기는커녕,  곧바로 죽음으로서

‘성경이 예고한 대로 철저히 그 각본을 수행’하고 있음을 분명 확인할 수가 있음이다.

 

‘아래의 구절’도 예수십자가형이 ‘기획된 연극임’

여실 없이 드러내 보이고 있는 매우 의미심장한 구절이다.

 

‘여호와 일파들’‘그 먼 날 후세에’, 즉 오늘날과 같이 과학이 도래한 시대에

‘그 누군가 나타나’

그 모든 것을 밝혀 줄 것을 이미 모두 예고하고 있는 듯한 분위기가 분명 감지된다.

즉 예수십자가형 각본을 수행하는 진행과정 중에

‘제자들은‘ 무슨 연유인지 몰라도 ‘기이하게도 모두 잠을 자고 있다.’

‘이 중요한 시점에 제자들이 모두 잠자고 있는 것이다.’

 

마태 27:43  다시 와 본즉 ‘제자들이 잠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

 

제자들 모두 동시에 눈이 피곤한 것도 이상하지만

이미 이전의 앞 구절에서도 또 한 번 잠을 잤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자고 있는 것은, 이들 제자들이 고도의 과학에 의해

마치 ‘마취시킨 상태’와 유사함이 확실시 된다.

 

마태 27:45  이에 제자들에게 와서 말하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실컷 2번이나 자고 나온 사람들 보고 왜 또다시 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우리도 병원에서 전신마취 한번쯤 해보면 기분은 참 좋음을 느끼기도 한다!)

 

그리고는 이내 곧 ‘예수(인자)가 곧 팔릴 것’이라고 ‘사전 공지’까지 하고 있는 판이다.

 

(제자들 종일 잠재워놓고  예수는 무슨 짓을 했을까!)

(예수 답변 : 다 암시롱. ‘어이! 남 선생 다 알고 있으면서, 왜 자꾸 그래!  낯간지럽게~’ )

 

아무래도 이전에 이미 ‘두 번’이나 잠재운 것이

의도적으로 ‘제자들을 마취시킨 것’으로 추론해 볼 여지는 충분하다.

그리고 마지막 결론의 관점은,

‘세 번의 공정 작업’이 매듭지어 지자마자

‘예수가 죄인에 의해 팔릴 것을 아주 자신만한하게 그것도 이번에는 고민하지 않고

힘차게 강조’하여 말하고 있음을 깊이 통찰할 필요가 있다.

 

46.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아니! 나를 파는 자가 왔는데  왜 예수가 ‘함께 가보자고’고 떠벌리는지.

떠버리 예수!  입 좀 다물고 있으면 어디가 덧나나!

 

나를 파는 배신자 가룟유다가 오는데,  예수는 신이 났다!   좋단다!

예수가 이 말을 할 때는 왠지 모르게 '대단히 감격적'이면서  입이 한 바가지다!

마치 '대탈출'에 성공한 것처럼  의기양양.

예수 입 찢어지겠다.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  살판났네 예수여!.

 

예수 십자가형 이후에 십자가형 과정에 대해 신약의 ‘요한복음’이 적고 있는 내용은

이미 그 이전의 구약(출애굽, 민수, 시편)에서 이미 모두예고하고 있는 사항들이다.

혹시 교회에 계시는 분들이라면 목사. 신부에게 물어보면 됨.

 

또 뭐 이상한 어려운 ‘한자’ 등을 사용해가면서 허황하게 설명할지도 모르지만,

절대 혼동하면 안 됨.

예를 들면. ‘성령이니. 예표니. 대속이니’ 라는 등의 말을 들어도

‘절대 현혹되지 말고’  지속적으로 이 ‘저자의 합리적 체계에 온 정신을 집중’하기를

단지 당부할 따름이다.

 

이제 이 시점 여기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가장 중요한 사항’이 하나 있다.

그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예수의 다리를 꺾지 아니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단 ‘예수 다리 꺾기 작업’을 분석하기 이전에,

먼저 ‘십자가형의 집행과정’을 잠시 한번 살펴본는 것이 '우선적 수순'이다.

 

일반적으로 죄수가 땅에 박아 놓은 장대에 ‘십자가 형태로 매달리게 되면’

‘가슴이 좁혀져 호흡이 불가능’하게 되어 ‘몇 분후 사망’하게 된다.

 

그래서 이를 방지하기 위해 ‘몸을 떠받칠 수 있도록 발을 고정’시키게 되는데

이 때 못을 사용하여 발을 고정시키면 고통은 극심하나

보통 1일에서 7일 까지는 생명의 유지가 가능하게 되며

‘그로 인하여 고통은 아주 극심하게 된다.‘

그리고 ‘못을 사용할 경우’에는 그 독이 퍼져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이

‘통상적으로 사망의 주원인’이 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아주 중요한 맥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이것이다.

십자가 위의 죄수는 장기간 십자가에 매달려 있게 되면

고통이 오랫동안 극심하기 때문에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서’ ‘다리뼈를 꺾게 되는데’

그 이유는 ‘다리뼈를 꺾게 되면’ ‘몸이 축 늘어져 심장을 압박함’으로서

이내 ‘곧 사망’하게 된다.

쉽게 이야기하면 '목조르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래서 십자가에 얹힌 죄수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서는’

‘바로 다리뼈를 꺾게 되는 것’이다.

 

이제 아래구절을 보자!

아래에서 ‘빌라도’는

‘예수의 다리를 꺾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예수가 벌써 죽었다 하니까’  도무지 이해가 안 되어

‘매우 이상하게 여기고 있는 장면’이다.

 

반드시 예수의 다리를 꺾어야  예수가 빨리 죽게 되는데

다리를 꺾지도 않았는데도 벌써 죽었다 하므로 이를 ‘매우 이상하게 여겨’

'언제쯤 죽었느냐'고  꼬치꼬치 묻고 있는 것이다.

마가15:40 ‘빌라도’‘예수가 벌써 죽었을까’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죽은 지가 오래냐.고 묻고.’

 

십자가형을 당하는 자가 빨리 죽었다 하니 뭐가 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어

빌라도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이상히 여기고 있는’ 형국인 것이다.

이제 상기의 구절이 왜 그와 같이 표현되어 있는지 이제 그 연유를 알겠는가.

위 구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기 바란다.

 

그와 같은 이유 때문에,

아래에서처럼 ‘유대인들’‘안식일날 행사 때문에’

‘빨리 예수를 조기 사망시키기 위해’

‘예수의 다리를 꺾어서 예수 시신을 치워달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음을 본 저자는 분명한 증거를 제시하는 바이다.

 

그런데, 보다 중요한 문제가 대두 된다.

 

‘그것은 예수의 다리를 꺾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예수가 이미 죽어 있다는 사실이다.’

 

도저히 100% , 있을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 발생하고 있다.

 

요한 19:31 ‘유대인들’‘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시체를 십자가에 두지 않게 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하니.

        32:33  군인들이 예수와 함께 못 박힌 ‘다른 두 사람의 다리는 꺾고’

              ‘예수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리를 꺾지 아니하고.’

 

예수 옆의 ‘다른 죄수들’ 모든 죄수처럼 

‘다리를 꺾는 보통의 경우처럼’ ‘일반적 원칙’을 따르고 있으나

예수는 다리를 꺾으려고 시도는 하나.

이미 벌써 죽어있기 때문에

‘다리를 꺾을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즉. 일반적 원칙을 완전히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이 해괴망측한 ‘특별 사건!’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그것은 오직 한 가지만으로 해석될 수가 있다.

즉. ‘이때의 예수’는 바로 ‘로봇’이기 때문에 그러함인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이때의 예수의 다리를 꺾게 되면 생각할 필요도 없이,

‘다리 속에  인간의 뼈와 피가 섞인 살집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전혀 다른,

‘전선 회로와 최첨단의 칩 등이 내장되어 있음’이 발견되기 때문인 것이다.

아무리 고대 원시인이라 하더라도

‘인간’‘기계적 장치’에 대한 구별 정도는 분명 할 수가 있을 것이고

또한, 보다 중요한 문제는 이를 '온통 경전 화하여 복음서화할 가능성'

불을 보듯 뻔한 사실이 될 것이다.

 ‘자칫 산통 다 깨질 판이다.’

결국 이런 모든 우여곡절은,

‘십자가에 얹힌 이때의 예수는 최첨단의 로봇’이기 때문에

‘온갖 해프닝이 일어나고 있음’을 분명 알아야 된다.

즉. 이는 '로봇의 작동상태를 정지시킨 것'이다. 

 'on' 상태에서   'off'상태로 정지시킨 것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TV 리모콘의 작동을 정지시키듯이..'

 

여호와는 이미 이런 로봇과 관련된 수많은 증거를 기타의 여러 경전들을 통해

증거화시켜 놓는 작업을 그들의 기획에 설정해 놓고 있다.

아래의 내용도 바로 ‘로봇’임을

그 증거로써 본 저자는 이 지구법정에 상정한다.

 

바로 [유다복음]이 확정된 증거자료를 예쁘게 마련해 놓고 있다.

아래의 유다복음에 등장하는 ‘어린 아이 예수’

‘로봇 기능체’일 가능성이 아주 농후하다.  거의 확실시 된다.

[유다복음}

예수는 그들과 함께 ‘이 세상 너머의 신비의 마지막에 무엇이 일어날지’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했다.

종종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자신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고’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그들 가운데 나타났다.

 

상기에서 예수가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말은

이때의 예수는 전형적인 ‘로봇’이라고 봐야 한다.

 

또한 사실 ‘고대에 조명시설 등도 제대로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이 어린 아이가 단번에 예수임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어른으로서의 예수의 얼굴이 아주 정교하게 형상화되었다’는 의미를

재빨리 감지해야 한다.

왜냐하면,

‘진짜 예수 어릴 때의 모습이라면’ 얼굴이 비슷해도

‘아마도 금방 알아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베토벤'이나 '히틀러'의 어릴 때 모습을 한번 살펴보면 성인 때의 모습과는

상당히 다름을 알 수가 있다.

예수가 여러 형태로 '변용되는 모습들'은 사실 목사. 신부들이 훨씬 더

아주 많이 알고들 있다.

 

아래는 복음서  ‘진복자 유그노스토스’의 구절을  본 저자는 전격 발췌 기재한다.

특히, 쇠약함이나 질병이 없다’라는 말에 초점을 집중시켜야 한다.

 

[진복자 유그노스토스]

‘천사’가 스스로 ’수많은 천사를 만들어’ ‘섬기게 했다.’

그들에겐 '쇠약함이나 질병이 없다’.

 

상기에서는 '2개의 천사'라는 용어가 나온다.

즉, 맨 처음에 나오는 앞쪽의 ‘천사’는 로봇이 아니라 

’인간‘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러나 또한 로봇형 천사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뒤쪽의 ‘수많은 천사를 만들어’ 라는 구절의 천사

‘로봇’이 확실시 된다.

그 이유는

‘수많은 천사들을 만들어 자기를 섬기게 했다‘라는 표현을 통해서,

‘자동화 체제에 의해 제작되어졌음’을 알 수가 있다.

또한 이들 수많은 천사들이 사용되는 용도가,

기존의 천사를 ‘섬기게 되는 용도로 제작’되었음을 분명 알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이들 로봇은 ‘쇠약해질 필요도 없으며’

또한 ‘당연히 질병도 결코 있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물론 기계적 장치로써의 '폐기 처분'만 있게 되는 것이다.

 

이제 또 하나의 ‘위대한 증거자료’를 지구행성의 인류에게 공개한다.

 

지구인류에게 전달할 가장 절정의 클라이맥스이다.

아래는 당시에 예수 십자가형 사건 당시

‘로마황제 ‘카이사르(시저)‘에게 보낸 ’유대 총독‘이었던 ‘빌라도의 편지’이다

아래의 ‘편지 내용’은 매우 의미심장한 내용이다.

 

그것은 우리 지구인류에게 좀 더 위대한 '비밀 열쇠'의 지평선을 점화시킬 것이다.

아래와 같은 표현의 설정은,

그 모두가 ‘예수가 로봇이기 때문에 가능한 표현’임을 깊이 통찰해야 한다.

 

 

[로마황제 카이사르에게 보낸 유대총독 빌라도의 편지]

 

- ‘예수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30세‘가량 되어 보인다.

   나는 ‘그렇게도 마음을 잡아끄는 평온한 얼굴을 본 적이 결코 없다.’

   ‘모든 신과 영웅 형상을 그린’ ‘수많은 화가도 그려낼 수 없는 유형의 사람이다.’

   그 나사렛 사람(예수)이 모습을 나타냈을 때

  ‘바닥에 붙여놓은 것처럼 꼼짝할 수가 없었다.’

   조용히 서 있는데도 ‘나는 형사범처럼 사지를 떨고 있었다.’

 

- 나 빌라도는 ‘예수를 처형코자 하는 악마 같은 유대인을 꺾을 방안을 생각했다.

  ‘그러나, 저들의 폭동이 염려된다.'

   그래서 '바라바'를 풀어주게 되었다.

 

상기의 증거를 통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로마인이 예수를 죽이고자 했던 관점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오히려 유대인이 적극적으로 예수를 처형하고자 안달이 나 있다는 사실’

재차 확인가능하게 해주는 위대한 증거자료들이다.

오히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도 그러했지만 오늘날도 살펴보면 확실히 이해가 될 수 있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기독교도들’‘타 종교를 얼마나 잔인할 정도로 배타적으로 공격하는가를 보면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사안이다.

 

그러나 상기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은 무엇일까 라는 관점은

매우 중요한 요체로써 우리에게 다가온다.

‘예수의 얼굴이 얼마나 평온해 보였기에’

‘또한 수많은 화가도 그려낼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도 평온해 보이는 유형’이기에

‘빌라도가 마치 자기가 죄인인 것처럼 사지를 벌벌 떨고 있다는 표현’이다.

 

‘당시 세계 어느 누구도 그려낼 수 없는 얼굴’이라는 표현을 빌라도는 사용하고 있음이다.

고대에도 뛰어난 초상화 화가가 많이 있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 신라의 ‘반가유상'의 깊고 온화한 얼굴의 미소를 한번 보라.

당시 가공할 예술을 보여주는 로마의 문화는 이미 정평이 나있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얼굴이 얼마나 그렇게도 평온해 보이길래’

어는 누구도 그려낼 수 없을 정도의 얼굴이라고 하는 것일까 .

이게 정상적으로 가능한 이야기인가!

 

이 해석의 핵심은 단 한 가지 밖에 없다.

이때의 예수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오지 한 가지!

로봇인 것이다.

로봇만이 가능한 것이다.

여호와가 로봇의 형상을 의도적으로 아주 평온한 모양으로 나타내 '증거화'시키고 있음을

명확히 알아야 된다.

그 먼 날 훗날에, 즉 '오늘날과 같이 과학이 도해될 시대가 될 때에, '

‘그 누군가가 나타나’

이 실재적 진실을 전 세계 인류에게 알려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의도가 내재되어 있음을 깊이 통찰해야 한다.

 

불교에서도 수많은 ‘로봇들’이 등장한다.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8부 대중의 하나인 ‘건달바’란 것이 있다.

‘건달바’ ‘술과 고기를 일체 먹지 않고’ ‘향기만 먹고 사는데’,

 ‘제석천을 섬긴다. 고 한다.

이것도 100% 확실히 그 성격상 기계적인 로봇임을 '분명히 나타내는 표현임'

알아야 된다.

우리들이 자주 불량배란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건달‘이라는 말도

바로 불교에서 유래된 말이다.

또한 이 ‘섬긴다.’는 표현이

공통적으로성경과 불교경전에서 동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

우리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다시 한 번 아래 복음서의 ‘섬기게 했다’라는 표현을 주의 깊게 관찰해보기 바란다.

[진복자 유그노스토스]

‘천사’가 스스로 ’수많은 천사를 만들어’ ‘섬기게 했다.’

‘그들에겐 쇠약함이나 질병이 없다’.

 

이제는 왜 예수의 다리를 꺾지 않는지를 완전히 이해가 되었는가.

아직도 뭐가 뭔지 모르겠는가.

그럼 이 글을 쓰는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쓸 수 있겠는가?  그러나 서두를 팰요는 없어요.

(이 글은 수필이나 소설처럼 읽으시면 안 됩니다.)

 

이제 그들 여호와 일행들이 이 모든 '창조 과학의 시스템'

단지 각본에 의해,

그 모든 것을 기획하고 있음은 100% 분명한 사실이다.

이 지구행성의 인류들이 골치 아파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런 글이 완벽한 형태로 지속적으로 계시되는데도 불구하고

‘완악함을 보인다는 것’은 결코 ‘여호와가 좋아할 것 같지는 않다.’

 

다시 이제 ‘각본으로써 증거화된 형태들’을 본격화해 본다.

이제는 좀 더 가슴에 와 닿을는지도 모르겠다.

 

출애굽 13: 46 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 밖으로 내지 말며 ‘뼈도 꺾지 말며.’

 

민수 9: 12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말아서’ 유월절 모든 율례대로 지킬 것이니라.

 

시편 3: 20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함이여!’ ‘그 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아니 하도다.’

 

‘결국 예수의 다리뼈를 꺾게 된다면’

그 뼈 속에는 ‘기계적 장치들’이 솟아져 나올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결코 우리와 같은 하나의 유기체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고도의 기능을 갖고 있는 로봇임’이 들통 나, 탄로가 난다면

다리뼈 속에서 ’전선과 같은 기계장치‘ ’금속 쇠붙이‘가 나오게 되면

모든 여호와의 기획이 완전 붕괴’가 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이 됨을

이제는 완전히 이해를 해야 된다.

‘그 모든 것이 각본에 의거 실행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지구인류가 예수 십자가사건에 관해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대속,

만인의 죄를 예수가 대신한다.’는 개념도 일부 나쁜 성직자들이

종교화를 통한 '수익을 위해' 만든 거짓된 범죄임을 알아야 한다.

 

이번에는  마태복음의 구절을 잠시 삽입한다.

아래 29절에서 이야기하는 예수의 관점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십자가형의 진정한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유추해 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단서조항이다.

마태 26:29  예수가 말한다.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 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예수는 ‘새 것’을 참 좋아하는구먼!

상기에서의 예수의 관점은 ‘대속이 아니라‘

‘대성공의 기쁨’에 젖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예수가 ‘새 것’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마시는 것’도 아주 좋아하는구나!.  원샷!

그날은 최소 ‘3차 까지’는 가겠네. ^^

 

또한 예수는 이어서 ‘내 아버지의 나라’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음이다.

‘하나님들의 행성’이라는 그 ‘천국 행성’에서 ‘새 것’ 즉 좋은 것으로

‘큰 행복의 누림’이 있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자주 사용하고 있는 '지구로부터의 탈출’이라는 의미도

이제는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사안이다.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의  ‘환상의 은하여행’

예수의 면전에 남겨져 있음이다.   얼마나 좋을까! 예수!

(혹시 빈자리 하나 없나.   나도 좀..., 의자 밑이라도 괜찮은데.)

 

메시아의 공통된 특징은 그 모두가 ‘고난과 역경이 따른다.’는 공통점이 있다.

 

모든 '그리스도들'(희랍어로 '메시아'란 뜻)이  도두 다 그렇다.

왜냐하면, 기득권 세력들이 이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들의 권력과 돈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아래의 증거를 본 저자는 상정시킨다.

누가 4:24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받는 자가 없느니라.’

 

후속적으로 파견된 메시아는  결코 기존 그리스도를 지지하는 자들로부터

'배척받는 것'은 확실한 '보편적인 원리'이다.

아래 구절을 한번 보자.

예레미아 37:15.  고관들이 노여워하여 ‘예레미아를 때려서’

                    .서기관 요나단의 ‘집에 가두었으니’

                         .이는 이들이 ‘이 집을 감옥으로 삼았음’이다.

                    16. .예레미아‘뚜껑 씌운 웅덩이에 들어간 지 여러 날 만에’

 

예수만 얻어터지는 게 아니다.

예레미아는 실컷 맞고, 그것도 모자라 여러 날 웅덩이에 가두었다.

그리고 뚜껑을 덮었다는데.

 

말이 그렇지.  실제 ‘여러 사람들로부터 집단 구타를 당하게 되면’

얼마나 마음의 상처가 클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복제재생과학’을 통한 ‘심판’‘반드시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메시아 ‘요셉’도 그의 형들이

‘깊은 웅덩이에 던져놓고 가버리는’

‘잔인한 패륜의 유기 범죄’를 저질렀을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거의 모두가 전부 살인 행위 보다 더 잔혹한 행위들이다.

결국 그러한 관점은 바로 지금 현재 존재하고 있는 ‘기득권의 그리스도만을 고집’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그래야지만  돈이 생기고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메시아가 연속적으로 계속 파견되는 메커니즘이라면’

이들이 결코 신이 될 수 없는 것은 또한 자명한 사실이 된다.

왜냐하면. 신은 오직 유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현실적인 문제, 즉 돈과 권력도 포기해야 된다.

모든 것이 '먹고 사는 문제가 제1의 우선순위'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호와 일파가 예수십자가형 사건을 추진한 이유는 무엇일가?

 

결국 여호와 일파가 이와 같은 예수 십자가형 사건을 추진한 근본 이유도

우리의 큰 관심 사항인바   그것이 의외로 아주 간단한 이야기다.

 

곧. 평균 수명 20년도 체 되지 않는 ‘암울한 고대 원시체계의 사회’

‘종교적 위안을 주기 위한’‘종교적 버팀목’을 주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많은 증거들을 추후 실증적으로 ‘그 모든 비밀들’

이 지구행성의 인류들에게 백일하에 드러내게 할 

많은 증거와 준비 자료가 이미 모두 준비돼 있음을 선포하며.

나는 이를 표출, '드러낼 것'이다.

 

결국 이러한 모든 기획 추진의 배경에는 여호와 일행들이 있다.

그들이 이 모든 것을 관장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의 구절을 통해 또 다른 확고한 증거를 이 지구 법정에 상정한다.

 

‘흰옷, 즉 소형 로켓이 장착 흰 우주복’을 입은

‘2명의 외계인 하나님들’이 작업에 참여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요한 20: 11-12 ‘마리아가 무덤 밖에 서서 울면서’

                   ‘몸을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흰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 시체 뉘였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편’에 앉았더라.

 

                 14. 마리아가 뒤로 들어가 ‘예수가 있는 것을 보았으나’

                      ‘예수인 줄을 알지 못하더라.’

 

상기에서는 ‘흰옷’ ‘우주복’이라 보면  거의 확실하다.

요한복음에서는 ‘나자로’ 라는 자가 부활을 하는데

이때에도 여지없이 ‘영광’, 즉 ‘비행체가 출현’, 직접 관장하고 있다.

 

복제재생작업 등은 필히 ‘작업대가 설치돼 있는 비행체가 있어야’ 실행 가능하다.

특히 상기의 14절에서

마리아가 ‘예수가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고는 있으나

‘이 자가 예수인 줄을 알지 못 한다고 하는 표현’을 통해서

이때도 분명히 ’로봇‘이 사용되었을 가능성’은 아주 농후해 보인다.

아래에서도 예수가 직접 ‘영광’‘고도의 비행체가 관여되어져’ 있음을

분명히 우리에게 인지시키고 있다.

 

요한  11: 39  예수가 돌을 옮겨 놓으라 하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죽은 자가 사흘이 되었으며 벌써 냄새가 납니다.”

               40. 예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 하였느냐.

 

결국 그 모든 것의 끝은 여호와 그가 우리 지구행성에 와야지만이

그제야 그 모든 것이 끝나게 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 될 것이다.

‘그 때가 지금이다.’

‘임박해 있음이다.’

결코 멀지 않았음을 나는 분명 전언코자 할 따름이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증거를 보여야,

이 세대들이 완벽히 믿고 정신을 차릴 것인지 나는 단지 지켜볼 따름이다.

 

바로 아래와 같은 예시를 또 하나의 증거로써 채택코자 함이다.

 

아래는 그들 ‘여호와 일파들’이 이 땅 지구에 올 때 귀환과 연관되는 시스템을

이미 경전에 명시해 놓고 있는바

저자는 그 증거를 본 지구법정에 상정시킨다.   저자가 기획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 여호와 일파들이 그 모든 것을 주도하고 있음을 유념하시기를 바란다.

 

아래에서는 분명히 이 땅 지구행성에 오는 여호와 일파들을

‘인자(人子)’라고 하고 있음에  안광을 집중시켜야 한다.

즉, 말 그대로 인자라는 의미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또 기독교들처럼 이상한 어려운 한자(漢字)를 자꾸 써 가면서 추상화시켜서도 안 된다.

 

마태24: 30   그 때에 ‘인자(人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땅의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또한 그들이 ‘하늘에서 나타난다.’ 함은

‘하늘’이라는 관점을 통해 증거화시키고 있다.

즉, 자연스럽게 ‘비행체가 하늘에 군집하고 있다는 말‘인 것이다.

 

또한 ‘비행체를 타고 오는 것’‘구름’이란 표현을 쓰고 있는바

고대 원시인들은 이 하늘을 나는 비행체를 전혀 이해 못 하기 때문에

‘구름이니 영광이니 하는 비유법’을 구사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또한 ‘모선 비행체’는 워낙 대단히 크고 장엄하기에

‘영광’이란 표현을 동원하고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아마도 ‘전장의 길이’가 최소1km~3km 정도의 길이가 되지 않을까’ 라고

추측해 보기도 한다.

 

 

 

상기에서 ‘땅의 족속들이 왜 통곡할까’라는 것도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지구 인간들이 통곡을 한다! 이 말은 무엇을 뜻할까?

저자의 생각으로는 아마도 극단적인 양 갈래가 있지 않을까 하고 추론도 해 보는바

하나는,

‘너무나 기쁜 나마지 크게 눈물을 흘리는 부류들’도 있을 것이고

또 하나는,

‘다가올 심판이 겁이나 그 무서움으로 후회하며 통곡’하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나름 생각해 보기도 한다.

 

                       

                 ( 여호와가 지구에 온다 중에서..  남 정 현 )

 

 

       이 심각하고 무서운 글을,

 일본(Japanese), 미국(American ),유럽(European) 등  전 세계 인류에게...

 

 

 

 

                            

                      ( 번 외 사 항 )

 

 

저번 글에서도 일부 언급한 적은 있지만

'일자리 문제'에 대한 후속적 견해를 개진해 나간다.

이는 물론 인류사회가 ‘로봇체제의 사회가 오기 전’에는

필요불가결한 요긴한 사안이기도 하며

특히 한국사회도 여는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아주 중요한 문제라 아니할 수 없다.

‘일자리 문제’는 사실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저자의 관점은 늘 서두르는 편은 아니다.

그런다고 쉽게 해결되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에 그러하다.

 

이미 저자가 제안한 ‘방안 1’‘방안 3’은 어느 정도 가닥이 잡혀져가고 있지만

‘방안 2’는 다소 나에게 정복당하기를 쉽게 용인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더욱 흥미진진하다. 나는 이런 스릴(thrill)을 매우 즐긴다.

‘해결 불가능’을 돌파해 나가는 것은 나의 의욕을 늘 고취시킨다. 삶에 있어서 큰 의욕을 불어넣고 있다. 그러니까 너무 재미있기도 하다. ^^

 

특히 ‘방안 2’는,

수행과정에서 ‘몇 가지 창의적 방안 도입의 여지가 필히 긴요’하며

이 문제가 다소 보통의 일반인들이 접근 불가능하게 만들 개연성도 있다.

이러한 ‘문제 해결 능력’은 보다 신속하게 해결해야 하는 능력을 보여야 하기 때문에

오히려 흥미진진한 관심거리가 될 수도 있다.

만약 쉽게 해결될 수 있는 사항이라면 나는 아예 관심을 안 가진다,

 

왜냐하면 그런 일은 누구나 할 수 있기 때문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 한다.

난공불락의 요새,  모두가 거부하고 대중이 돌아서 있는 일에

나는 더욱 더 큰 스릴을 느낀다.

그런 일은 의외로 간단히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들이 많다.

마치 나사못에 일자 홈을 열십자 형태로 홈을 판다면

드라이버로 훨씬 돌리기가 쉬운 것처럼 말이다.

 

실제로 모든 대중이 간단하게 해결 가능한 사안의 것들은

기술적인 유형의 문제들이기 때문에 해당 관련자들에게 맡기면 된다.

저자는 공직에 몸담고 있지가 않다.

일자리 문제는 특히 공직자에게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

그렇다고 모든 공직자에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고

5% 정도의 관련 당사자들에게 책임이 있다고도 보인다.

국민이 ‘십시일반으로 낸 세금’으로

현재 급여와 수당, 차량과 기름 등을 지원받을 경우는

사실 전적으로 공직자에게 해당될 사항이다.

 결코 저자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전혀 연관성이 없다.

0%이다.

사실 무슨 ‘계약이 성립’된 것도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계약의 불이행이라는 관점’도 전혀 성립요건이 형성될 수는 없다.

 

오히려 이러한 매우 중대한 현 정부의 ‘가장 핵심적인 정책 키워드’에 대한

‘의욕과 추진 원동력을 위한 자극을 주고 있다’는 점에서는

상당히 일조를 한 부분도 없지 않아 있다.

저자는 단지 ‘당정청의 핵심 관련자들’이 직접 강력하게들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잠깐 나의 생각을 정리해 보았을 뿐이다. 거기에서는 출발되었을 뿐.

저자가 제안하는 것은 ‘민원제기’가 아니다.

곧 민원제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

즉 ‘문제 해결 능력’에 관한 특허권적인 권한을 제시’하는 것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불타는 합리성’의 관점에서 언급되어질 수도 있는 그러한 사항이다.

 

내게는 어떤 책임도 없는, 즉 전혀 이해관계도 없는 곳을 노크하고 압박한다면

그것은 곧 크게 이치를 벗어나는 것이며 오만한 태도다.

‘여호와 일파의 준엄한 심판이 따르는 경우는 대체로 불합리성에 근거를 두는 경향이 많음’을 깊이 염두에 둘 필요성이 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이번의 번외의 장'에서는 인류종말에 즈음하여

다소 연관되는 여호와 일파들의 관점들을  있는 그대로 실어보기도 한다.

아래의 성경구절들은 그와 같은 취지를 잘 반영해 주고도 있다.

 

다니엘 9:27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하게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누가 21:26 ‘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다.

 

길을 가다가 비를 맞았는데 왜 하늘 보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가.

그것은 일기예보 제대로 안 보고 우산준비도 게을리 한 본인에게

전적으로 귀책사유가 있는 것이다.

즉 그러한 연유는 그 자신에게 전적으로 ‘무능의 책임’이 있을 뿐이다.

 

또한 이와 같은 저자의 창안적인 제안은 일종의 ‘무형적 자산’으로써

전적으로 저자의 ‘자유권’에 속하며

한편으로 무형자산으로써 일종의 ‘특허권’임을 직시해야 한다.

 

저자는 과거에도 다소 시회개혁적인 글들을 자주 집필해 왔다.

그런 맥락의 차원에서 ‘그저 간단히 머리에 자꾸 떠오르기 때문’에 정리하고

재차 수정하고 있는 정도일 뿐이다.

그저 평범하게 떠오르기에 머릿속에 그냥 두면 갑갑하고 해서

글로써 단지 한번 표출시켜보고자 하는 정도라 할까.

그런 후는 늘 머리가 가벼워지고 후련한 느낌으로 편안해 지곤 했음이다.

 

저자가 다소 늦은 나이에 공무원 공부를 한 적이 있는데

저녁쯤 되어 동료들과 술자리가 가끔 마련되면 자주 정치적 방안들을 이야기하곤 했는데

동료들은 내가 하는 말을 아주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곤 했다.

내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탁월한 감각’, ‘비상하다’면서 정치에 입문하라는

이야기를 자주 하곤 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입문할 수 있느냐고 물으면

‘국회의원 사무실로 한번 찾아가 보라’고 여러 사람들이 자주 이야기하고들 했는데

이후 자주는 아니지만 사실 한 두 번 찾아가 본 적도 있다.

그러나 그런 국회의원 사무실에 가보면 사실 거기 근무자들은 생각했던 것 보다는

무척이나 인상들이 그렇게 썩 좋지가 않았다.

이런 사람들이 정치하는 사람들인가 싶었다.

인상이 뭐 랄까. 무슨 ‘야바위꾼’ 같기도 하고, 상당히 거리감을 느끼곤 했다.

공자나 칸트, 퇴계 이황 같은 그런 인상의 사람은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거기서 내가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는 등의 이아기를 하면 그들은 내 말을 유심히 듣고 그 뒤 확인해 보면 내말을 빠르게 반영시킨다는 것을 보고

‘그때 나는 참으로 깜짝 놀라기도 했다.’

나는 그저 평범한 이야기라고 생각해서 이야기 했을 뿐인데 ‘쉽게 반영을 시키는 것을 보고 적지 않게 놀라기도 했다.’

이후 그들을 다시 찾아 갔을 때는 그들이 ‘나를 전혀 모는 는 사람인 척 하면서

고개를 돌리는 것’을 보고 또 한 번 놀라기도 했다.

역시 인상들이란 것은 ‘생긴 대로 노는구나.’ 하며 상당히 ‘이질적인 거리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 이후부터는 다시는 국회의원 사무실을 찾지 않았다.

 

아래의 성경구절은 우리의 마음을 섬뜩하게도 하고 있음이다.

 

마태 16-27   인자(예수는 ‘사람’이라는 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데살로니가전   3:3   예수가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할 때

                               하나님들(원전에는 ‘엘로힘’)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기를 원한다.’

이후에도 정치에 입문하라는 이야기를 여러 곳에서 또 자주 몇 번 들은 적은 있지만

무슨 ‘야바위꾼’처럼 생긴 원체 ‘인상들이 좋지 않은’ 그런 곳에

왜 가야 돼! 결코 가보고 싶은 마음이 안 생겼다.

 

시편 33:15. 그(여호와)는 ‘그들 모두의 마음을 지으며‘

                  ‘그들이 하는 일을 굽어 살피는 이’다.

 

그 이후 그 도서관에 출근하면은 내가 오는 것을 보고

‘대통령 출근‘이라 하면서 반 농담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물론 지나가는 소리겠지만.

이후에도 ‘대통령’ 소리를 또 들었다.

영연방 4개국 및 세계축구협회에 보낸

나의 다소 창의적인 ‘축구규칙 개정에 대한 소견’이라는 30여 쪽의 글을

당시 같은 학원에 다니던 몇몇 수강생 여성들이 그 내용을 보더니

“이 사람 대통령해야 될 사람이네” 라면서 ‘진지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유심히 나를 응시하던 아줌마들이 아직도 눈에 생생하기도 한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닌 내용 같이 보이는데도 말이지..

이 축구 규칙 개정과 관련하여 당시 ‘잉글랜드 축구협회’와 마찬가지로

‘스코틀랜드 축구협회장 명의’로도 내게 서신이 날아왔는데

그 서신에는 ‘새로운 축구제도를 하나 만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라는

내용이 있었는데 그 때는 그들이 ‘나의 제안’에 대해 다소 비아냥거리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었는데

이후 최근에 와서 가끔 한 번씩 생각해 보니

오히려 그들 ‘앵글로 색슨족’이나 ‘켈트족’ 등 영연방 민족들이

사실 아주 ‘신사적인 사람들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실 내가 제안한 ‘새로운 여러 시스템들’을

‘조금만 변형시켜 지기들 것으로 만들어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데도 불구하고

전혀 그런 방법을 취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오히려 그들이 ‘뭔가 깨끗하고 정의롭다’는 인식이 최근에 자주 들기도 하는 정도이다.

만약 내가 제안한 시스템을 약간 변형해서 사용하면서.

‘’이건 네가 제안한 것과는 똑같지 않잖아!‘’ 하면서

시스템을 조금 변형해서 사용해도 충분히 가능한데도

전혀 그런 방법을 사용하는 경향은 보이질 않는다.

내가 제안한 내용의 어떤 부분적 변형도 하지 않겠다는 취지도 사실 좀 있어 보이기도 한다.

(물론 개정 내용이 마음에 안 들 수도 있지만. ^^ )

 

내가 국회의원 사무실에 가서 정치적 방안에 대한 제안을 했을 경우와는

완전히 차원이 좀 다르다.

‘반영은 하고 안면을 싹 바꾸는 식’‘모르는 사람인 척’ 하는 식이였는데…….

 

사실 축구하는 것 보면 우리 모두가 느끼겠지만 너무 단조롭지 않는가.

‘공을 뻥 차고 우르르 뛰어갔다가 또 이쪽으로 차면 우르르 패스하면서 가고

반칙이 일어나면 흐름이 끊기게 되고. 공은 쉴 새 없이

라인 밖으로 자주 나가 흐름이 자주 차단되는 등

너무나 지나칠 정도로 상당히 원시적인 부분이 없지 않아 있는 것은

확실히 분명해 보인다.

사실 저자가 현대 과학의 범주를 벗어나는 ‘6번의 기적’을 보고 책을 집필하면서

여호와가 이 땅에 오는 ‘필연적 사실을 논증해 나가면서’

이 일을 세계에 알리는 것을 그저 마음 편안하게 하고 있는 정도이며

원체 너무나도 큰 사건이기 때문이지만

만일 이후 시간이 되면 진짜 새로운 규칙에 의한 축구(^^)를

한번 창안 해볼 욕심도 가금 한 번씩 일어날 때도 있다.

 

‘일자리 창안’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언제나 새로운 시스템을 창안할 때는 초기 단계 추진과정에서는

최소 ‘2가지에서 5가지’ 정도의 ‘1차 문제점들’이 반드시 필히 대두됨을 알아야 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시스템은 기존에 없는 ‘창안(創案)적인 제도’이기 때문에

그러함이다.  

아직까지 한 번도 이런 시스템이 없었기 때문에 그러하다.

이런 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기다리면서 즐겨야 된다.

‘돌발사태가 있어야’ ‘그제서야 참 재미를 느끼게 되지..’^^

다시 말하면, ‘어! 돌발 변수가 나타나야 되는데 왜 빨리 안 나타나.’

그래야 재미가 있는데.. 하는 식이다.

나는 이런 것이 너무 재미있다.

반드시 어려운 문제점의 난항이 생길 때 삶의 보람을 느낀다.

나는 짐승이 아니다. 그래 우리 모두는 지성을 갖고 있는 인간.

그래 인간이다 하면서..

겁 낼 필요는 없다. 모두 해결 안 되는 것은 세상에 없다.

단지 ‘문제 해결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겁을 내는 것이지..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일을 추진 중에 나타나는 이러한 돌발 문제점들은

‘시간을 너무 오래 끌면 안 된다는 단점’이 있다.

왜냐하면 이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일이 진척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예산도 낭비될 수도 있고 분위기도 가라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더 흥미진진하며 스릴 있는 재미를 만끽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때 진정한 능력과 실력이 나타날 수도 있음이다

‘문제 해결 능력’, 바로 그 대안 제시의 능력을 말하고자 함이다.^^

 

이제 가장 심오하고도 매우 중요한 사안인 ‘여호와 일파들이

이 땅 우리 지구행성에 오는 내력의 합리적 체계에 대한 것을

극히 일부의 내용만 피력해 보는 장을 마련해 본다.

 

‘여호와와 예수와의 차이’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그것은 마치 여호와가 ‘히말라야 산맥’이라면

예수는 단지 그 밑의 ‘자갈돌’ 하나에 불과하다.

아래는 우리 지구인류에 대해 여호와가 준엄한 경고의 목소리를 한번 들어본다.

 

예레미아 23:8  그러므로, 여호와가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가 내 양떼를 흩으며 그것을 몰아내고 돌보지 아니 하였다.

                      보라! ‘내가 너희의 악행 때문에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다.’

 

내가 나의 이 글들을 ‘무서운 글’이라고 수십 번 강조는 하고 있으나

아직도 이를 잘 이해 못하는 자들이 너무나 많다.

 

여호와와 예수 등이 ‘이 땅 지구를 공식적으로 방문하는

                   마지막 그 종말에’

그들의 지구인간 심판과 관련되는 내용은

성경의 각 복음서가 증언하고 있음을 가슴에 분명 새겨두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관점은 여호와가 그의 입으로 직접 하는 이야기임을 명심해야 한다.

 

요한계시 11:3-4  내(여호와)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1260일(42달, 3년 6개월)을 예언하며

                            그들은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라.

시편   33:10 ‘      여호와’ 나라들‘계획을 폐하며’

                            민족들 ‘사상을 무효하게’ 한다.

 

이사야 66:18        내(여호와)가 ‘그들의 ‘행위’와 ‘사상’을 아노라.‘

                      ‘때가 이르면’ ‘뭇 나라와 언어가 다른 민족들을 모으리니’

                          ‘그들이 와서’ ‘ 나의 영광(UFO, 모선 비행체)을 볼 것’이다.

 

그러한 관점은 예수는 전혀 모르고

오직 그의 친아버지 여호와만이 알고 있는 사항임을

분명히 인지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일자리 창안에 대한 접근적 고찰에 대한 소견

1. 방안 1

가. 수용가능성                     80%

나. 성공 가능성                    95%

다. 고용 예상 인원                100,000~300,000명 (십만~삼십만)

*시간선택제 적용시               200,000~400,000명 (이십만~사십만)

라. 주 연령층

마. 문제점                           특이 사항 없음. 추후 변수는 조정.

바. 시간선택제 적용 여부       적용 가능

 

2, 방안 2

가. 수용가능성                     70%

나. 성공 가능성                    85%

다. 고용 예상 인원                200,000~300,000명 (이십만~삼십만)

*시간선택제 적용시               300,000~400,000명 (삼십만~사십만)

라. 주 연령층

마. 문제점                           특이 사항 없음. 추후 변수는 가능함.

바. 시간선택제 적용 여부       적용 가능

 

3. 방안 3

가. 수용가능성                     80%

나. 성공 가능성                    80%

다. 고용 예상 인원                10,000~30,000명 (일만~삼만)

라. 주 연령층

마. 문제점                           지역성

바. 시간선택제 적용 여부       부분적 적용 가능

*시간선택제 적용시               20,000~50,000명 (이만~오만)

 

- 상기를 토대로                   최소 310,000명 ~ 최대 850,000명

                                        (31만명에서~85만명까지) 고용창출 예상됨.

 

                                    * 물론 좀 더 정확한 산출을 위해서는 실증적 자료가 필요함.

 

 

 

 

 

 

 

출처 : 엔카 컴나라
글쓴이 : 6번기적을보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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