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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치욕의 역사가 숨쉬는곳,남한산성 둘러보다

청 송 2014. 5. 20. 11:19

치욕의 역사가 숨쉬는곳,남한산성

 

 

조선시대 남한산성은 국방의 보루로서 그 역할을 유감없이 발휘한 장소였다.

특히 조선 왕조 16대 임금인 인조는 남한산성의 축성과 몽진,항전이라는

역사의 회오리를 이곳 산성에서 맞고 보낸 바 있다.

오늘날의 남한산성은 인조 2년(1624)부터 축성되어 인조 4년(1626)에 완공 되었으며,

산성 내에는 행궁을 비롯한 숭열전, 청량당, 지수당, 연무관 등이 들어서

수 백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문화유산으로 자리 잡았다.

 

 

지화문(至和門)

정조 3년 성곽을 개보수 할때 지화문이라 칭하였고 4대문중 가장크고 웅장한 중심문이며

유일 하게 현판이 남아 있다.

 

 

 

 

 

제6암문(서암문)暗門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곳에 설치한 성문으로 일종의 비밀 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작고 적에게 쉽게 식별될 수 있는 시설도 설치 하지 않았다.

인조 15년(1637년)1월 23일 한밤중에 쳐들어온 청병을 크게 물리친 곳 이라 하여

이 암문 부근을 "서암문 파적지" 라 부른다

 

수어장대와 청량당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1호,제3호

수어장대는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적목적을 위해 지은 누각이다.

남한산성에 있는 5개의 장대중 유일 하게 남아 있다.

 

 

 

 

**북한산성과 함께 수도 한양을 지키던 조선시대의 산성이다**

신라 문무왕 13년(673)에 한산주에 주장성(일명 일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의 남한산성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기록은 없으나 조선『세종실록지리지』에 일장산성이라 기록되어 있다.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으로 갖춘 것은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을 겪고 난 인조 2년(1624)이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이 문으로 나가서...

 

 

 

 

 

연주봉옹성(連珠蜂 甕城)

옹성은 일반적으로 성문을 보호 하기 위해 한겹의 성벽을 더둘러 쌓은

이중의 성벽을 말 한다. 남한산성에는 5개의 옹성이 있다.

 

 

 

 

행궁

남한산성에는 유사시 임금이 피난 할수 있도록 행궁 시설을 건립 하였다.

그와 더불어 종묘와 사직을 모실수 있도록 좌전과 우실을 마련 하였다.

 

만해 한용운 기념관

 

동문(東門)

남한산성에는 4개의 대문이 있는데 동문은 성의 남동쪽에 위치하며

남문과 함께 가장많이 사용했던 문이다. 

 

송암정터(松岩亭址)

옛날 황진이가 금강산에서 수도를 하다 하산하여 이곳에 와보니 사내들과 기생들이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희롱 하려드는 사내들에게 불법을 설파 하였다는 곳이다.

바위위에 서있는 고사목(소나무)은 정조가 여주 능행길에 "대부"벼슬을 내려

"대부송"이라 부른 소나무 이다.

★★★★★★★★★★★★

이상 두서없이 살펴본 우리의 피맺힌 한이 서려있는 역사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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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엔카 컴나라
글쓴이 : 송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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