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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남철수작전 전후 참전기

청 송 2015. 2. 17. 07:40

흥남철수작전 전후 참전기  (1950. 10. 1 - 1950. 12. 27) 

<제3사단  戰車攻擊大隊 '만화'같은  이야기>

              , 작전장교  박학선 중위

(육사 8기, 예비역 준장, 전 제1사단장, 1928년생)

 

 

 

1.   1950년 10 1일  제3사단 최초 38선 돌파

 

 

    나는 제3사단의 전차 공격대대의 작전장교 S-3였다.

우리 부대는 57밀리 대전차포로 무장될 예정이었으나,

장비가 미쳐 미국에서 조달되지 못해 보병 전투임무를 수행하게되었다.

그 당시  우리 부대의 대대장은 소령이었으며, 다음이 중위계급인 나였고, S-1은 군악장교출신의 중위였다.

중대장과 소대장 이하의 모든 장교는 중∙상사 출신으로서 일주일 간의 단기 교육을 마치고 동시에

부대로 배치되어 동기생끼리 중대장∙소대장이 되었다.

병사들은 부산 부두 노동자, 시장 장사치 등에서 몰려 온 피난민 중 젊은 사람부터 40세에 이르는 사람까지를 모아

일주일 간의 제식훈련 및 소총을 다루는 기초 훈련을 마치고 부대로 배치된 사람들이었다.  

우리 부대의 임무는 보병 연대들이 진격하면 그 뒤에 인민군 패잔병들이 분대 혹은 소대규모로 마을을 습격하거나

주 보급로를 차단하는 것을 격퇴하면서  전선 부대를 따라가는 것이었다.

하루 40킬로 씩의 강행군이 시작되었다.

 

행군 중 어느 면사무소에 들렀는데그 곳 직원이 전화를 걸면서 “국방군이 어디까지 왔느냐?” 하고 물었다.

우리는 이미 그들 옆에 있는 데도 말이다

우리 부대의 강행군은 매일 매일 계속되었고우리는 북으로 북으로  진격하여 들어갔다.

(고성원산의 중간쯤에 위치한 포구浦口)에서 동복(冬服)과 기타 보급품을 받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보급품을 싣고 오던 배가 고저항구에 들어오면서 인민군이 설치한 기뢰(機雷)에 맞아

침몰하게 된 탓에 우리는 동복은 물론 기타 여러 보급품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아직은 추위가 대단하지 않아 큰 지장이 없을 것이라 판단하고 우리는 북진을 계속하였다.

 

10 11일 우리는 드디어 원산에 이르렀다.  (전진부대는 10 10일 원산 수복.)

원산은 석유공장이 있었는데 이미 아군의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고

부두의 주요시설도 이미 파괴되어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다행히 주택지와 상가는 피해를 받지 않고 있었다

공산당원들은 이미 빨치산으로 되어 모두 철수하였고, 일반 시민들만 남아있었으며,

우리를 환영해 주었다.

우리는 원산에서 10여 일을 머물게 되었다.  

 10 26일 미 제10군단이 이원(利原)에 상륙을 했고

미 해병 제1사단과  미 제7사단 등이 북진(장진호 방면)을 계속했다.

우리의 임무는 그들의 후방 보급로를 안전하게 지키고, 뜻하지 않게 나타나는 적의

 분대에서 소대에 이르는 패잔병들을 습격하여 격퇴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계속 북진을 하게 되는 것이다.  

 

2.  함흥으로의  진격, T-34탱크 및 76mm 자주포 포획

    북진을 계속해서 함흥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무척 놀랐다.

기차역은 완전히 폐허가 되어 있었고, 도시도 크게 파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수색 끝에, 우리는 함흥으로 이르는 직선의 긴 철도 터널을 찾아냈고,

그 안에서 소련군 T-34전차 15~16대와 76밀리 자주포 10여 문을 발견하였다.

우리는 그것들을 포획함으로써 '전차 공격대대'가 아니라 '전차대대'가 되었다

이를 위해서 미군에서 Russel 대위가 교관으로 우리 대대에 파견되었다.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 전차 조정술을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 통역이 큰 문제가 되었다

당시 미군 부대에는 약간의 한국군들 (주로 대학생들이 통역관으로 활약하고 있었음)이 있었지만

통역관 수가 부족해서 우리 부대에는 누구 한 사람  보내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내가 그 통역을 담당하게 되었다나의 통역임무는 38선을 넘기 전에 임시로 수행했던 일이 있다

어느 날 인민군의 장거리포가 제3사단 사령부를 포격하게 되었는데

 여기에 놀란 국군의 문관 통역관 5명이 새벽을 틈 타 전부 도망가 버렸다.

 

이것 때문에3사단은 미국 해군의 함포 지원과 항공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어찌 알았는지 미 고문관이 특공대장으로 출동 준비 중인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통역관으로 임명한다고 말하고 사단장 앞으로 나를 데려갔다

그때부터 얼마 동안 나는 통역관으로 활약하게 되었는데,

나의 주 임무는 항공 연락장교와 같이 근무하면서 함포지원, 공중지원을 받게 하는 것이었다.

 

Russel 대위는 2차 대전 중, 구라파에서 전차 중대장을 하던 사람이었다

 자동차 운전병들을 주로 뽑아서 나와 같이 훈련을 시켰는데

전차 조종이 나의 예상보다는 아주 쉽고 간단했다.  

하지만 전차의 무전기는 주파수가 달라 사용할 수 없고포의 조준경은 이미 모두 사라지고 없는터라,

 우리는 포구(砲口)에 실로 십자가를 만들고 직접 조준을 해서 포사격 훈련을 해야만 했다.

 

11월 초,  북청(北靑) 이르렀을 때그곳 기온은 무척이나 떨어져 있었고우리는 곧 추위를 느끼게 되었다.

이는 우리가 동복을 보급받지 못했기에 큰 문제가 된 것이다.

  하지만  마침 한 민간인이 와서 이 부근 어느 곳에 가면 인민군의 피복 창고가 있는데

거기에 인민군 동복이 많다고 알려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곳을 찾아갔고과연 그곳에는 인민군 동복이 많았다.

인민군 동복은 솜을 누벼서 만든 상의와 하의들이었으며색깔은 노란색이 아주 짙은 국방색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곳에서 방한모도 발견할 수 있었다그것들을 가지고 와서 온 대대원들에게 입혔다.

 

그러니 우리 부대는 복장 상으로는 완전히 인민군이었다인민군 동복을 입고 우리는 또 북진을 계속했다

우리가 북진하는 동안 가는 곳 마다 그곳의 부락민들이 나와서 우리를 환영해 주었다

 

한 마을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이 국방군을 환영하러 나왔는데,

인민군을 맞게 되었다고 실망하고, 겁을 먹기도 하는 울상들이 되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총은 인민군 소총이나 따발총이 아니라 미군의 M-1소총이었기에,

이것으로 우리는 갈팡질팡하는 시민들을 설득시킬 수가 있었다

 

날씨가 점점 더 추워졌다주 보급로를 따라 북진하던 중 미군 병참 보급창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내가 그곳으로 가서 책임 부사관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장교용으로 방한모, UN잠바 및 기타 피복을 얻어서 우리 장교들에게 입혔다.

그러니 복장으로 보아서는 미군 장교들이 인민군을 인솔해가는 형국이 되었다.

그리하여 가는 곳마다 국방군을 환영하러 나온 부락민들을 이해시키는 일이  일과가 되었다.

 

 3. 단천에 도착

 

    전차 교육을 마치고, 우리는 전차를 이끌고 단천으로 이동했다

우리는 단천에서 계속 머물게 되었는데우리의 임무는 해안선을 따라 성진으로 이르는 길과

혜산진으로 가는 길목의 교통 요충지를 방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성진 쪽으로 가는 보급로에 게릴라들이 나타나 막히면 우리가 전차를 끌고 가서 길을 터주고

 혜산진 쪽으로 나타나면 전차를 끌고가 게릴라들을 막곤 했다.

 

우리가 단천으로 오기 전 연도의 시민들이 대환영을 하다가,

‘이것은 국방군이 아니고 인민군이 국방군을 가장한 것이다.

 ‘우리를 전부 체포하거나 쏴 죽이러 온 것이다.’ 라고 해서 대소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우리가 모는 전차도 소련제이고 복장도 인민군 복장이기에그런 일이 생기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겨우 설명을 하여 사람들을 진정시킨 일이 있었다

우리는 북진을 하는 동안 여러차례  인민군 소집단의 습격을 격퇴해야 했었다.

 

4. 단천에서 흥남으로 철수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오늘 야음을 이용해 흥남으로 철수하라는 군단의 명령을 받았다.

중공군이 두만강을 넘어  남하해 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명령대로 자정을 기해 그곳을 떠나게 되었다.  

그런데 수많은 시민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우리의 뒤를 따라 같이 떠나게 되었다

우리는 강행군을 거듭해서 흥남부두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런데 도착해 보니미군 사단과 국군 사단들은 이미 배를 타고 떠난 후였고,

미군 제1해병사단이 중공군에 밀려서 계속 부두 쪽으로 후퇴하는 중이었다.

공중에서는 계속해서 중공군을 향한 폭격이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 폭격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때때로 그 연기까지 관측되는 것이었다.

 바다에는 약 200여 척의 각종 선박이 떠 있었고, 부두에는 엄청난 양의 군장물자들이 선적을 기다리고 있다.

엄청나게  많은 주민들이 보따리를 이고 지고 하여 부두 쪽으로 몰려드는 바람에

미군 헌병들은 통제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 전차와 자주포를 실을 LST를 배정받고 있었고, 그것들이  선적될 순차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 부대는 다음 날 미국 병력 수송선인 Noble 호에 승선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정작 부두에서는 발동이 제대로 안되는 차량이나 장비를 배에 실을 때,

배에 실는 대신 그냥 바닷물에 처넣고 있기도 하였었다.

 

Russel 대위가 아침 일찍 나보고 같이 부두로 가자고 했다.

그리고 부두에서 돌아올 때 나보고 자신의 차를 운전하라고 하는데나는 무슨 영문인지 몰랐지만 그를 따랐다.

부두에 도착해 보니 Jeep 차량과 3/4 차량을 가지고 들어오는 미 해병 제1사단 선발병력이 있었다.

그들은 이곳에 도착하자 마자 차를 주차장에 세우고바로 옆에 있는 난로를 피우고 있는 천막 속으로 뛰어갔다.

그런데 Russel 대위는 방금 도착한 Jeep 차에 앉아우리 부대로 돌아가자고 했다

 나보고는 자기 차를 몰고 뒤에서 미군 차량이 따라오면 방해하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무슨 일인지 모르고 시키는 대로 했다그리고 우리는 무사히 대대 본부로 돌아왔다.  

돌아오자 Russel 대위는 Jeep 차를 짚 낚가리 속으로 집어넣었다.

거기에는 기관총과 C-레이션(미군 야전식량)이 가득 실려있었다.

그는 백색 페인트를 빨리 구해야 한다고 했다.

그 후 차의 범퍼에 우리 부대 번호를 찍어 넣었다.

그리고 이 차량을 대대장용으로 쓰라고 했다

 

내가 깜짝 놀라서 남의 차를 도둑질해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2차 대전 중 구라파에서는,

Jeep차가 문제가 아니라 탱크도 남의 부대에 가서 훔쳐왔다고 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우리는 전 병력을 승선시키게 하고,  

나와 Russel 대위는 전차와 자주포를  LST에 탑재하는 것을 확인키 위해서 이동했다

그런데 부두 사령관이 Russel 대위와 나를 긴급히 불러서 가 보니  

이승만 대통령에게서 온 긴급 전보가 있었다.

 

'한국군의 장비를 LST에 싣는 것을 취소하고거기에 피난민을 전부 태우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크게 실망했으나, 인간의 생명이 더 귀하고 우리는 전차가 없어도 싸울 수 있다고 판단했기에 승낙하였다.

다만 전차 3대와 자주포 2문은 나중에 전쟁 기념관에 보존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설득해 승인을 얻었다.

그리고.....  LST는 피난민들을 콩나물처럼 가득 채우고 떠났다

 

우리는 Noble 호에 승선하게 되었는데큰 배가 있는 곳까지는 조그만 해군 보트를 이용하여야만 했다.

하지만 날씨가 추워 물이 튀면 얼굴이나 피복에 금방 얼음 꼬투리가 생겼다

몸에 배낭과 무기를 가득 지고 배의 그물 사다리를 올라가는 것은

병정들에게 훈련된 바가 없어 겨우겨우 매달려 기어 올라가는 형편이었다.  

우리는 미군이나 한국군의 맨 마지막, 그러나 미 해병대에 앞서서

12 23  흥남항구를 떠나게 되었다.

 

 여전히 공군 비행기는 하늘에 가득했고폭격하는 폭음과 연기는 점점 더 가까워져 왔다.

우리가 떠나는 순간에도 전투기들은 공중에서 계속해서 접근해 오는 중공군을 향해 폭격을 가하고 있었고

 부두에는 산더미 같은 군사물자들이 아군에 의해서 불 질러 태워지고 있었고

그 연기가 온 부두에 가득했다.

 

얼마나 왔는지 밤이 새고 날이 밝고 해서 12 24일 우리는 속초에 상륙하였다.

도착해 보니 우리보다 먼저 출발한 LST T-34전차와 자주포들을 하역하고 이미 떠난 후였다.

이런 다급한 철수의 와중에서도 미군들의 철수계획에 의한 탑재와 하역집행에는 철저함을 실감하였다.

 

5. 속초에서 대관령, 그리고 원주. <잃어버려진 대대의 행로>

 

     속초에서 1박을 하고 우리 사단 사령부를 찾아가야 하는데우리는 이미 완전한 고아가 되어 있었다.

아무 곳과도 통신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대관령을 넘어서 원주로 향하기로 결정하고,  12 25  아침 일찍 출발했다.

길 양쪽 종대로, 역시 복장은 완전히 인민군 복장에, 소총은 M-1 소총

태극기를 달고,  Jeep 차와 T-34전차에는 대공포판을 얹고 대관령을 넘고 있었다.

그런데 미군의 정찰기 L-19 경비행기가 계속 우리의 상공을 비행하고 있다

때로는 그것이 아주 저공으로 와서 이상하게 생각했다.

우리를 경호해 주는 것인가 하고 생각하기도 했는데

얼마 동안 있다가 가면 또 다른 비행기가 와서 우리의 상공을 비행했다.

속초 출발 시부터 원주에 이르고 ... 해가 저물 때까지 계속 그 비행기는 우리의 머리 위에 머물렀다.

횡성을 지나 원주에 도착했을 때,  26일, 우리는 거기서 드디어 제3사단을 만나게 되었다

사단 고문관과도 만나게 되었는데 거기서 우리는 의문을 풀 수 있었다.

3사단 사령부는 우리 대대가 완전히 실종된 것으로 판단하였던 것이다

우리도 고아가 된 줄만 알았다.

그런데 미 제8군 사령부 작전 상황실에서 대관령에 인민군 패잔병이 진격해 오고 있다는

비상정보가 들어와서 긴장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경비행기가 정찰했던 것이었는데정찰을 해보니 판단이 서지 않았다고 한다

복장으로 봐서는 인민군이고,  T-34 전차를 봐도 인민군이 확실한데

 M-1 소총을 들고 있고태극기를 휘날리고대공포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봐서는 국군이었기 때문이다

 통신 연락도 되지 않아 계속해서 감시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우리가 도착해서 고문관을 만나니 그 문제가 일시에 해결되었고우리는 미아(迷兒)에서 본대를 찾았고

사단도 행방불명 1개 대대를 찾게 된 것이었다.

 

 다음 날, 1950 12 27 사단은 횡성 북방으로 진격하게 되었는데

진격이 여의치 않아 우리가 전차를 앞세워 길을 뚫어야 했다

T-34 전차포와 기관총으로 길 양 편을 사격하면서 무사히 적진을 돌파할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만화 같은 작전'이 이로써 끝났든 것이다.

 

후기;  6.25참전 시, 박 장군님께서 재미있었던(?) 에피소드가 있었다기에

특별히 요청하여 이 글을 받았으며,

6.25한국전쟁진실알리기운동본부가 이에 게재합니다.

저자는 '한국예비역 기독장교회 연합회' 자문위원으로 활동하셨으며

현재 미국( OCU 남가주 지부)에 유하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