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걸작 사진10장 6.25전쟁이 터지자 생활필수품을 한보따리 싸서 머리에 인체 아기를 업고 피난가는 이 젊은 새댁 사진은 전쟁 발발 직후 발행된 미국 LIFE잡지(1950년 7월 10일자)에 전면 크기로 실렸다. 얼마전 워싱턴 근교에 선 일일 골동품 시장에 갔다가 이 잡지를 발견하고 얼마나 반가웠던지... 이 새댁의 모습이 요즘 인기 절정 드라마 "굳세어라 금순아"의 주인공을 연상시키지 않습니까? 왼쪽에 삽입한 사진은 필자가 TV화면을 보고 촬영한 것. 전투 중인 미군 아저씨들로부터 철모를 얻어쓴 인천 상륙작전이 끝난 뒤 한 해병이 파괴된 인천 시내를 순찰하다가 어린 아이와 만난다. 치열한 전투에서 살아남은 행운아들이다. "유토피아"(이상향)이라는 다방 간판이 폐허가 된 거리 풍경과 아이러니칼한 대조를 이루고있다. (미국 국립 문서보관소 사진) 미군 찦차에 실려 두 손자와 함께 피난 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있는 사진인데, 사진 설명을 보면, 중공군과 전투가 있으니 동네를 떠나달라는 미군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동네 이장인 이 할아버지가 피난 가기를 거부, 할수없이 찦차로 모시고 가는 길이라고 적혀있다. (미국 국립문서보관소 사진) 6.25가 터진지 열흘이 지나서 미군은 처음으로 오산 죽미령에서 인민군과 싸웠으나 중과부적이었다. 계속 남하하는 북한 침략군을 저지하기 위해 북으로 행진하는 미군들과 그 정반대 방향으로 피난 가는 사람들의 표정이 무겁다. (미국 국립문서보관소 사진) 하도 많이 봐서 이제는 탱크가 지나가도 어린 동생을 등에 업고 식량 구하러 간 엄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미국 국립문서보관소 사진) 머리엔 무엇인가 잔뜩 이고 지팡이를 짚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두 아줌마...아마도 식량을 구해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일 것이다. 길 옆에서는 미군들이 대포를 쏠 준비를 하고 있다. 피난길에 걸어가면서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엄마. 이 아기가 지금은 56세쯤 되었을 것이다. 어디선가 8순 할머니가 된 어머니를 잘 모시고 살고 있을 것이다. (LIFE 잡지 사진) 북진하는 탱크에 방해가 될세라 얌전히 길 한쪽에 한줄로 서서 걸어가는 피난민 대열. 자세히 보면 젊은 사람은 없고 노인들과 아녀자들 뿐이다. (미국 국립문서보관소 사진) 미군으로부터 초컬랫을 받고있는 어린이. 처음 보는 것이라 과자인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미국 국립문서보관소 사진) |
[6·25 전쟁 65주년] '돌아오지 못한 영웅'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국군포로 현황 국민일보 최현수 군사전문기자 입력 2015.06.25. 03:20 수정 2015.06.25. 03:21
6·25전쟁이 발발한 지 25일로 65년이 된다. 전쟁의 포성은 그쳤지만 북한에 억류돼 아직도 고향땅으로 돌아오지 못한 국군포로와 그 가족들에게는 아직 이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1953년 7월 정전협정 체결 시 국군 실종자는 8만2000명으로 추산됐다. 당시 포로교환으로 한국에 송환된 국군포로는 8343명에 불과했고 상당수는 북한에 억류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가운데 정부가 귀환한 국군포로들의 증언을 토대로 현재 북한에 거주하는 것으로 파악한 사람은 560여명이다.
국군포로들은 북한에서 당국의 엄격한 감시와 극한 생활고로 힘겨운 생활을 하는 것으로 24일 알려졌다. 국군포로들은 일부 인민군에 배속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내무성 건설대’라는 이름으로 탄광과 제철소, 건설 현장에 투입돼 막노동으로 생계를 꾸려가야 했다. 국군포로와 가족들은 ‘43호’라는 이름으로 분류돼 끊임없는 감시를 받아야 했고 대학에 진학하거나 좋은 직장을 가질 수 없도록 원천적인 차별을 받았다. 가난하고 힘겨운 북한사회에서 이들은 ‘천민’ 취급을 받으며 생활하고 있다. 육군 백골부대 소속으로 참전했다가 1951년 2월 북한군에게 잡혀 북한에서 생활하다 2008년 한국에 온 이규일(89)씨는 “국군포로의 자녀라는 이유로 4남매가 받았던 모멸과 천대는 다 표현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런 어려움을 견디다 못해 위험한 귀환길을 택해 고국으로 돌아온 사람은 80명에 불과하다. 국군포로의 귀환은 1994년 고 조창호 중위가 돌아온 것을 시작으로 매년 한두 명씩 중국 등 제삼국을 거쳐 꾸준히 이어졌다. 하지만 2011년부터는 이마저 중단됐다. 북한이 통제를 강화한 데다 고령으로 이동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에 돌아온 국군포로 가운데 39명이 사망했고 현재 41명만이 생존해 있다.
정부가 국군포로 송환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정전협정 직후부터 1960년대까지 정부는 11차례 군사정전위원회를 통해 미송환 국군포로 문제를 제기했다. 하지만 북한은 ‘국군포로는 전원 송환했고 강제억류 중인 국군포로는 단 한 명도 없다’며 송환 요구를 묵살해 왔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 열린 제1차 남북 국방장관회담 때도 국군포로 문제 해결을 촉구했지만 북한은 협의 자체를 거부했다. 정부는 남북 적십자회담 시 이산가족 범주에 이들을 포함시켜 일부 생사를 확인하고 가족 상봉을 성사시키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이제는 더 늦기 전에 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이들의 송환을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이 높아지고 있다. 국군포로 대부분이 80대 후반으로 상당수가 곧 사망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한영복 6·25국군포로가족회 대표는 “민간 차원에서 국군포로들을 송환하는 것은 한계에 달했다”며 “정부가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제성호 교수도 “정부는 국가를 위해 희생한 이들에 대한 국가적 도리로 이들의 생사 확인은 물론 가족 상봉과 왕래, 귀환을 우선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현수 군사전문기자 hscho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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