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甲濟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남침 이후 3일간(72시간), 이승만 대통령의 행적>이라는 논문의 著者(저자) 남정옥 박사(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는 기습 받은 李 대통령의 긴급 대응을 이렇게 극찬하였다.
< 남침 이후 3일간 李承晩은 국가원수로서 군통수권자로서 해야 될 일을 정확히 수행했다.
그 3일간은 75세의 노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가히 살인적인 스케줄이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짜여진 이승만의 3일간(72시간) 행적은 완벽, 그 자체였다.
최고의 참모진도 그와 같은 매뉴얼을 작성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런 매뉴얼이 작성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완벽하게 수행하기에는 너무나 어렵고 벅찬 업무였다.
그런데 이승만은 그것을 완벽하게 해냈다. 국가지도자로서 그의 위대성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기습 받은 나라의 지휘부는 보통 공황상태에 빠지는데(스탈린은 독일군의 기습을 받은 후 며칠 간 출근을 하지 않고 지휘도 포기하였다), 李 대통령은 신속하게 반응하였다(북침론을 주장하는 놈들은 이것도 트집을 잡아 전쟁을 준비하였다고 우길 것이다.)
南 박사가 재구성한 李 대통령의 일정은 이렇다.
< 6월 25일 10:00시, 남침상황을 보고받은 직후, 이승만은 곧바로 하와이에 머물던 구축함 3척에 대한 신속한 귀국지시(11:00시경)를 내리는 것을 시작으로 무초 대사와의 회동(11:35), 駐美대사관 전화(미국지원 요청, 13:00), 긴급 국무회의(14:00), 미국에 무기와 탄약지원 요청(오후), 미 극동군사령부에 전투기 지원 요청(오후), 무초 대사와 2차 회동(22:00 이후), 국방장관 신성모에게 군사경력자 회의 지시(22:00시 이후) 등의 조치를 취하였다.
전쟁 다음날인 6월26일에는 새벽부터 맥아더 장군에게 전화(03:00), 무초 대사에게 전화(04:30), 치안국 방문(아침), 대통령 지시로 군사경력자 회의 개최(10:00), 국회 본회의 참석(1100-13:00), 육군본부와 치안국 상황실 방문(14:00), 서울 시경국장 피란 건의 접수(21:00), 주미 대사관에 전화(27일, 01:00 이후), 맥아더에게 전화, 신성모와 조병옥 등 피란 건의 접수(02:00), 청량리에 敵의 戰車(전차)가 진입하였다는 경찰의 보고에 따라 경무대 출발(03:00), 서울역 출발(04:00) 등이다.>
李 대통령은 사흘 간 거의 잠을 자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南 박사는 <남침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국가위기 해결을 위한 국가 안보 시스템이나 매뉴얼은 존재하지 않았다>면서 <이승만은 당시 미국의 대통령처럼 국가안전보장회의(NSC)나 중앙정보국 그리고 미 국방부 및 합동참본보부로부터 전쟁 상황을 보고받고, 대책을 건의 받아 전쟁을 지도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신의 지식과 경험 그리고 오로지 자신의 판단력에 의존해 전쟁을 지도해 나갔다>고 했다.
< 戰時 국사를 처리하는 데 있어 이승만은 두 가지 원칙하에 행동했음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우선 대통령과 자신과 정부 그리고 군이 해야 될 일을 정하고, 그것부터 처리해 나갔다.
그 다음에는 전쟁수행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을 미국에 알리고, 그 다음부터는 미국으로부터 그것을 얻어내는 데 주력했다.
대신 순수한 군사작전에 관한 사항은 군부에 일임했다. 미국에 대해서는 밀고 당기는 압박전술을 구사했다.
대신 도움을 받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을 철저히 수행했다. 對美외교를 통해 미국으로부터의 무기지원과 미국의 참전을 위해 노력했다.
이를 위해 이승만은 먼저 무초 駐韓미국대사를 경무대로 불러 미국의 의중을 떠 본 후 대통령 자신의 전쟁에 대한 인식과 향후 대한민국이 어떻게 이 전쟁을 수행해야 할 것인지를 명확히 밝혔다.
주미 한국대사관을 통해 미국의 지원을 얻도록 확실한 지침을 내려 이를 실행에 옮기도록 했다.
결국 미국은 장면 대사가 유엔안보리에서 한국의 입장을 밝힐 연설을 할 수 있도록 주선했고, (장면을 만난)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의 참전을 넌지시 시사했다.>
남정옥 박사는 "전쟁중에 이승만은 자신이 꼭 해야 할 일과 절대로 하지 않아야 할 일을 구분하였다"고 했다.
李 박사가 절대로 허용하지 않아야 할 일이라고 다짐한 것은 한국 정부의 해외(제주도 포함) 이전(또는 망명)과 일본군의 참전이었다는 것이다.
南 박사는 KBS의 '6월27일 일본 망명 타진' 보도에 대하여 "이승만의 머리 속에는 일본 망명이란 말조차 들어갈 틈이 없었다"고 했다.
,,,,,,,,,,,,,,,,,,,,,,,,,,,,,,,,,,,,,,,,,,,,,,,,,,,
李承晩 대통령은 남침 보고를 받은 지 두 시간도 안 되어 미국 정부를 대표하는 駐韓 미국대사 무초를 불러 미국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남정옥 박사는, 이 자리에서 李 대통령이 한 말은 한국의 대응 방향에 대한 지침이 되었다고 높게 평가하였다.
< 이승만은 한국군에 ‘더 많은 무기와 탄약(more arms and ammunitions)’이 필요한데, 그 중에서 소총이 더 필요하다면서 미국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승만은 또 총력전 의지를 피력했다. 즉 모든 남녀와 어린이끼지 막대기와 돌을 가지고라도 나와서 싸우라고 호소하겠다고 했다.
실제로 전쟁기간 우리는 군과 경찰뿐만 아니라 여군, 학도의용군, 대한청년단, 청년방위대, 소년병, 유격대, 노무자 등 全국민들이 북한공산주의와 맞서 싸웠다.
특히 대한민국이 가장 위기를 맞은 낙동강 전선에서 더욱 그랬다.
이승만은 이어서 그동안 한국은 제1차 세계대전의 배경이 됐던 제2의 사라예보가 되지 않도록 노력해 왔다고 말하면서, 이 위기를 이용, ‘한국의 통일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승만은 지금의 위기가 한반도 문제를 항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best opportunity)'가 될 것으로 여겼다.
전쟁이 어찌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는 벌써 한반도의 통일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승만이 전쟁을 가볍게 본 것이 아니라 이미 김일성이가 38선을 먼저 파기했으니 이 참에 통일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 그 출발점이 바로 전쟁 당일이었다.
회동이 끝날 무렵 무초대사는 李 대통령에게, “언제든지 불러 달라(available all day)”고 말했다.
이에 따라 이승만은 그날 저녁 22:00시에 무초 대사를 경무대로 다시 불러 회동을 가졌고, 그 다음날 새벽 04:00시에는 전화를 걸어 미국의 지원을 촉구했다.>
"남녀와 어린이끼지 막대기와 돌을 가지고라도 나와서 싸우라"라고 호소하는 지도자가 일본 망명을 요청하였다는 글을, 3류 공상소설이 아니라 '단독 보도'로 내어보낸 것이 역사를 모르는 KBS였다.
2015-07-11, 17:40
'6.25관련 사진,동영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전쟁발발에서 휴전까지의동영상 * (0) | 2015.10.09 |
---|---|
"여명"이라는 말(馬)을 아시나요? (0) | 2015.09.06 |
백마고지 (0) | 2015.07.13 |
6.25란......?무엇인가? (0) | 2015.07.01 |
[스크랩] 鄭淳台의 6.25南侵戰爭이야기 (0) | 2015.06.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