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7년 독일에서 발행된 엽서와 그림들
▲ 수확/1867년 엽서
▲ 점치는 풍경/1867년 엽서
▲ 제물포 풍경과 양반/1867년 엽서
▲ 서울풍경과 조선군/1867년 엽서
▲ 비인 현감 이승렬
이 그림은 바질 홀 함장의 항해기에 게재된 그림으로 홀 일해의 상륙 사실을 확인하고 있는 비인 현감 이승렬의 모습이다. 홀 함장은 귀로인 1817년 8월 12일에 아프리카 서해안의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유배중이었던 나폴레옹을 방문하였다. 나폴레옹과 홀은 남다른 인연이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피리의 브리엔느 유년 사관학교에 다닐 적에 나폴레옹은 그가 가장 아끼던 후배였기 때문이었다. 이때 홀은 그가 스케치해 온 조선의 풍물을 보여 주었더니 당대의 영웅 나폴레옹도 갓을 쓰고 흰 수염을 한 노인을 가리키며, "아, 이 긴 담뱃대, 참 보기 좋다.'라며 매우 신기해 하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조선에 대해서도 여러가지로 물어 보았다고 한다. |
▲ 조선 관리와 수행원/맥레오드 항해기에 실려있다.
▲ 소청도 주민들/맥레오드 항해기에 실려있다.
▲ 배재학당 교사/아펜젤러 촬영
▲ 엿장수 소년들/독일 엽서
▲ 거리 풍경 외국 엽서
▲ 가슴을 내놓고 다니는 여인들
조선시대에는 딸을 낳으면 크게 환영받지 못한데 비해, 아들을 낳으면 집안의 경사일뿐만 아니라 아들을 낳은 여인은 '누구 누구의 모친'이라는 경칭을 얻고 시댁에서의 발언권이 확실해진다. 이런 가부장적 태산(胎産) 문화 속에서 시골보다는 서울에서 더 많이 보이는 여인들의 외출할 때 모습은 더욱 이색적이다. 외출을 한다는 것 자체가 위험이 따른다고 생각하는 모양인지 문 밖을 나설 때는 꼭 동방 마호메트 여인들처럼 몸과 얼굴을 가리고 다닌다. 머리 위까지 녹색 장옷을 뒤집어쓴 모습은 마치 몸체가 보이지 않게 요술 수건을 쓴 유령이 돌아 다니는 듯하다. 이렇게 몸을 칭칭 감싸면서까지 여성의 미덕을 보존하겠다는 가냘픈 조선 여인의 태도는 모슬렘이나 터키 여인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점이다. 이렇게 몸과 얼굴을 싸서 감춘 차림새에도 불구하고 |
활용해 왔다는 사실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 방바닥 밑으로 연결된 통로를 통해 더운 연기가 지나면서 충분한 열기를 만들어 내는데 설치 방법도 간단하다. 이렇게 기막힌 난방법을 세계 속에 널리 알려야 하지 않을까. (프랑스 여행가 듀크로끄) 아궁이 밑에서 때는 불의 열기와 연기가 구들장 사이를 지지면서 방바닥을 덥힌다. 이러한 난방은 겨울철에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가장 따뜻하게 지낼 수 있기 때문에 연료가 부족한 지역에서는 확실히 권할 만하다. 사용하는 땔감도 나뭇가지나 통나무 등 저렴한 것이며, 이마저도 없다면 잡초, 나뭇잎 등 어느 것이라도 땔감으로 활용된다. 이 때문에 한국의 서민들은 이웃 나라인 중국과 일본 사람들보다 따뜻한 집에서 살고 있다.(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 아랫목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지 못할 정도로 뜨거웠다. 100년 전 우리 나라를 여행했던 서양인들은 '따뜻함'을 훨씬 뛰어넘은 이 '뜨거움' 때문에 밤잠을 잘 이루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들의 기록에는 '사람을 굽는다'라든가 '사람을 지진다' 또는 '사람을 익힌다'는 표현도 자주 등장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익숙하지 않았던 방안의 '냄새'도 그들에게는 고통이었다. 문이나 창문만 열어 놓지 않으면 오랫동안 보온이 되어 상당히 편리했으나 겨울에 방 안에는 신선한 공기가 너무 결핍되어 있는 것 같았다. 코레아 사람들은 실외에서는 옷을 아주 따뜻하게 입었고, 밤에는 펄펄 끓는 방바닥 위에서 빵처럼 구워지는 게 아주 익숙되어 있었다. 처음부터 불편한 잠자리였다. 방바닥이 너무 뜨거워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자 일어나 문을 열어 젖혔으나 얼마 후 추워서 다시 닫을 수 밖에 없었고, 오분 후에 똑같은 짓을 반복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아무리 신선한 공기가 많이 들어와도 방안의 냄새는 사라지지 않았다. 마늘과 오물 냄새는 방 안에 아주 배어 있었다. 이 냄새가 순간적으로 심해질 때가 있어 그럴 때에는 속이 뒤집히려 했다. (스웨덴 기자 아손 그렙스트의 <코레아 코레아 > 중 )
조선 집은 나지막하고 방의 크기는 약 6척 높이에 넓이는 8척 쯤이다. 이 나라에서는 나무를 아껴 써야 하는데도, 밖의 기온이 영하 15∼20도로 수은주가 내려가면 사람들은 방이 뜨끈뜨끈하게 불을 땐다. 온돌방 밑에 네 골을 만들고 그 위에 얇고 넓다란 돌을 덮어서 그 위에 다시 흙을 바르고 맨 위에 기름에 절인 종이를 바른다.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방바닥은 우리 서양 사람들이 빵을 구어 낼만큼 뜨겁지는 않아도, 방바닥이 얼마나 뜨거운가를 경험해보지 않은 여행자는 까딱하다가는 엉덩이 살을 지지기에 꼭 알맞다. 이 곳 사람들이야 수백 년간 습관이 들었기 때문에 이 뜨거운 방바닥에서도 한편으로 돌아누운 채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도 아무렇지도 않게 잘도 잔다. (1902년 애쏜 써드의 『서울 견문록』중에서) |
▲ 궁궐수비대/콘스탄스 테일러[Koreans at home]1904'실린 사진
▲ 다양한 한국인들/콘스탄스 테일러 [Koreans at home 1904'] 실린 그림 겨울모자를 쓴 여인, 궁중용 모자, 옛군인 모자'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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