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로스는 즉위한 직후부터 무서움을 보여 주었는데 그가 즉위한 그 해에 아버지였던 필리포스 2세에 의해 강압적으로 코린토스 동맹을 맺은 고대 그리스 국가 중 하나였던 테베가 이러한 어린 왕의 즉위에 틈타 "마케도니아에 어린 아이가 올랐으니 혼란스러울 거라 판단"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소식을 듣고 알렉산드로스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반란을 진압했음은 물론 테베를 그리스 지도에서 영원히 소멸시켜 버렸다.
또한 동쪽으로 오랫동안 그리스 영토를 칩입했던 페르시아 제국의 아케메네스 왕조을 무너뜨리고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자가 된 것도 모자라, 남쪽으로는 이집트를 정복하여 이집트 왕의 호칭인 파라오가 되었고, 나아가 지금의 인도 부근까지 정벌하여 고대 그리스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개척한 인물이다. 게다가 페르시아를 박살낸 기간만 따지면 고작 8년으로 정복 속도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한국에선 영어 발음인 알렉산더 대왕으로 통용된다. 그의 스승은 고대 그리스 철학에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손꼽힌 아리스토텔레스인데 참고로 아리스토텔리스의 스승은 플라톤이며 플라톤의 스승은 그 유명한 소크라테스다.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의 아들로 아버지가 그리스를 제패한 뒤 암살당하면서 약관 20세(탄생년도가 기원전 356년, 필리포스 2세의 사망년도가 기원전 336년)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사실 필리포스 2세가 너무 절묘한 시기에 암살당한 탓에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어머니 올림피아스가 암살의 배후가 아니냐는 의혹이 당대에도 제기되긴 했다. 필리포스 2세가 애첩에게서 낳은 어린 아들을 후계자로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었고 위기감을 느낀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어머니 올림피아스가 암살을 사주했을거란 소문이 나돌았지만. 증거가 없는 관계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왕위에 즉위했다.
알렉산드로스가 즉위하자마자 보여준 천재적인 군사적 재능을 감안한다면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을 필리포스 2세가 꺼린 것이 이상한 일이지만 그때까지 알렉산드로스는 아직 소년에 불과했기 때문에 군사적 중책을 맡은 적은 없었고 따라서 필리포스가 알렉산드로스의 전설적인 군사적 재능을 완전히 꿰뚫어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당시의 정세를 감안하면 어쩌면 필리포스는 알렉산드로스에 대해서는 언제나 그를 다른 후계자로 교체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할 가능성이 충분한 상태였다.
우선 알렉산드로스는 사춘기로 접어들면서부터 아버지 필리포스 2세와 내내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는 순수한 마케도니아인이 아닌 혼혈인 반면[5] 필리포스의 후실이었던 클레오파트라[6]가 낳은 아이는 순수한 귀족 마케도니아인이었다. 이 때문인지 필리포스와 클레오파트라의 결혼식때 필리포스의 측근이자 클레오파트라의 삼촌이었던 아툴루스라는 장군은 '이 결합으로 인해 마케도니아의 훌륭한 후계자가 태어나길 바랍니다'라고 축원하는 일까지 있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알렉산드로스는 분노하여 '넌 내가 안보이냐'라고 소리를 친 뒤 술잔을 던졌는데 이에 분개한 필리포스는 알렉산드로스를 향해 칼을 빼들기도 하였다. 그 뒤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어머니는 추방당하는 신세가 된다.
후에 클레오파트라가 사내아이를 낳았고 이대로 가다간 알렉산드로스의 왕위계승은 절망적인 상황이나 다름없어보였다. 그러던 것이 필리포스가 암살을 당함으로써 극적으로 반전이 된다. 사실상 필리포스의 암살은 알렉산드로스에겐 대단한 횡재였는데 이 때문에 증거는 없지만 현재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반쯤 암살범 취급 당하는 중.
필리포스가 죽었을 당시 그는 누구도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하지 않은 상태였다. 따라서 내분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다행히 군대가 알렉산드로스를 왕으로 지지하였고 따라서 그는 마케도니아 왕으로 등극한다. 그가 군대의 신임을 얻은 이유는 그나마 다른 왕자에 비해 필리포스의 군에 종군한 경험이랑 공적이 많았기 때문...필리포스가 테베와 아테네의 연합군을 꺾은 카이로니아 전투에선 알렉산드로스가 좌익을 지휘하기도 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왕위에 오르자 자신과 왕위 계승을 다퉜던 왕자들을 모두 죽였는데 이를 보면 그의 원한이 얼마나 사무쳤는지 알 수 있다.[7] 특히 알렉산드로스에게 가장 위협이 되었던 애첩 클레오파트라는 딸과 함께 산채로 태워죽었다고 한다. 물론 이건 알렉산드로스의 어머니가 평소에 클레오파트라를 증오하여 제멋대로 저지른 일로 알렉산드로스는 이를 듣고 상의도 없이 일을 저지르냐며 노발대발 하였다.
클레오파트라를 붙여준데다 추방의 계기가 되었던 축사를 해서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던 장군 아툴루스는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가족 전체가 쑥대밭이 된다. 우선 아툴루스는 처형당하고 그의 가족들도 모두 죽음을 당한다. 그의 아들만이 용서받았는데 그 이유는 알렉산드로스의 어머니인 올림피아스가 그에게 독을 먹여 정신이상자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쨌든, 실컷 분풀이를 끝낸 알렉산드로스는 곧바로 그리스 전체의 반란에 직면하게 된다. 괴물급인 필리포스 2세가 죽고 겨우 20세에 불과한 애송이가 왕위에 올랐으니 반란을 일으킬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필리포스 2세에게 개박살난 뒤 강제로 코린트 동맹으로 묶여있었다.이때 알렉산드로스의 측근들은 모두 외교로 해결하라고 조언하였으나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기병 3천명만 이끌고 신속히 남하한다. 이러한 전격전으로 인해 마케도니아의 가장 가까이에 있던 폴리스인 테살리아가 가장 먼저 제압당했고 테살리아의 병력을 인수한 알렉산드로스가 남하하자 모든 그리스의 도시들이 사절을 보내 용서를 구하고 알렉산드로스는 이들에게 모두 죄를 묻지 않는 선처를 베푼다.
일년 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를 공격하기 전에 우선 북쪽 국경을 안전하게 해두고 싶어서 지금의 이스탄불 북서쪽에 위치한 트라키아인들을 공격하여 제압해둔 뒤 도나우 강까지 올라가 그 곳에 위치하고 있던 게타이(훗날의 다키아) 부족을 격파한다. 그때 일리리아(그리스의 서쪽, 이탈리아와 아드리아해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지역, 현재의 크로아티아, 알바니아)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는다.알렉산드로스는 즉각 그 지역으로 이동하여 반란을 일으킨 세력을 모두 진압한다.
그때 알렉산드로스가 전사했다는 소문이 그리스에서 퍼졌고 따라서 테베가 반란을 선동하고 여기에 편승해 아테네도 반란에 참여한다. 알렉산드로스는 즉각 남하하여 우선 테베를 포위했는데 테베인들은 결사적으로 항전하였다. 그러나 결국 테베는 점령당했고 알렉산드로스는 테베를 완전히 파괴하고 주민들을 모두 노예로 팔아버려 아테네와 쌍벽을 이루었던 강력한 도시인 테베는 비참한 종말을 맞이한다. 다만 시인 핀타로스의 집은 부하들에게 절대로 파괴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테베는 옛날에 페르시아 전쟁 때도 페르시아의 편을 들었다가 실익이 별로 없었는데 이번에는 헛소문만 믿고 억지만 부리다가 알렉산더 대왕에게 제대로 박살이 나버렸다. 아테네의 경우는 테베가 처참하게 완전히 박살난 사실을 확인하고는 겁을 먹고 무조건 항복했기에 알렉산더 대왕은 아테네에 대해서는 대단히 관대하게 대해줬다고 한다. 실제로 알렉산더 대왕이 아테네를 파괴했다거나 하는 기록은 없다.
저런 바쁜 군사활동을 단 일년만에 마무리 지은 알렉산드로스는 다음해에 드디어 군대를 이끌고 헬레스폰트를 건넌다. 사실 비잔티움 쪽으로 가는게 더 나은 방법이긴 했으나 이 지역은 독립된 도시국가가 자리하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와 발칸 반도를 가르는 좁은 해협,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가 대군을 이끌고 건넜던 바로 그 곳이다.)
알렉산드로스가 상륙하자 그 지방의 페르시아 사트라프(태수)들은 각각의 군대를 끌고 나와 합류한 다음 그라니쿠스라는 곳에서 알렉산드로스와 조우하였다. 이들은 강을 사이에 두고 포진하여 알렉산드로스의 진격을 저지하려 하였다. 알렉산드로스의 부하장수들은 밤에 강의 상류 지역으로 올라가 건너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알렉산드로스는 허를 찌르기 위해 자신의 기병대로 즉각 도강하여 공격하였다. 알렉산드로스가 그렇게 대담하게 강을 건너 공격할 줄은 예상못한 페르시아군은 완전히 격파되고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에서의 첫 전투를 대승으로 마무리 짓는다.
이 싸움의 승리로 인해 아나톨리아의 서부 지역은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된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보단 그리스와 친한 이오니아 지방의 그리스계 폴리스들을 회유[8]하며 거침없이 남하한다. 그는 아나톨리아 서부 지역을 해안선을 따라 쭉 돌면서 점령하며 내려왔는데 이는 항구도시들을 모두 장악함으로써 페르시아 해군을 고사시키기 위해서였다. 마케도니아군은 해군이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만이 페르시아 해군을 견제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페르시아 해군은 그리스 출신의 멤논이라는 사령관의 지휘를 받아 마케도니아군의 보급선을 끊으려 했으나 거의 성공할 무렵 멤논이 갑자기 병으로 죽은 데다 항구도시들이 마케도니아군에게 점령되면서 해체되었다.
이렇게 점령하는 동안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썰어서 풀어 전차를 득템한 일화를 남기기도 하였다. 즉 '이거 푸는 사람이 짱먹음'이라는 말에 풀다 짜증난 알렉산드로스가 칼로 치고 세계를 정복했다는 이야기.
아나톨리아 서부를 제압한 뒤 겨울을 나고 23세가 된 알렉산드로스는 봄이 되자 시리아 쪽을 향해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시리아에 진입하기 위한 관문인 이소스라는 곳에서 그는 다리우스 3세가 그동안 열심히 모아 두었던 페르시아의 대군과 조우한다. 다리우스 3세는 자신이 직접 군대를 지휘하였고 총 병력은 11만에 이르는 대군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4만여 병력이었기 때문에 병력상으론 알렉산드로스가 불리하였다.
그러나 이소스는 의외로 좁은 평야였고 따라서 적은 병력을 가진 알렉산드로스에게 유리한 지형이었다. 다리우스가 굳이 이런 곳에서 싸우기로 한 이유는 불명확하다. 아마도 다리우스가 병력의 우세에 우쭐했을 수도 있고 다리우스가 터키 지역의 침략을 일년간이나 방관한 것을 변명하기 위해 조급하게 싸움을 서둘렀기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른다. 학자들에 따르면 페니키아 지역에 있는 도시들이 알렉산드로스의 접근으로 인해 상당히 소란스러웠다고 하였는데 이는 즉 다리우스가 늑장을 부린 것 때문에 그의 능력에 대한 신뢰를 많이 잃은 상태임을 알 수 있다.
이소스 전투 초기에 다리우스 자신의 병력을 강 북쪽으로 포진시킨 뒤 알렉산드로스가 강을 건너면 공격할 생각이었다. 게다가 이소스에 포진함으로써 알렉산드로스가 점령한 터키 지역과 그의 본대의 길목을 차단하였으므로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의 주문대로 강건너 공격해야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초기엔 다리우스가 유리한 입장에 있게 되었다.
그런데 전투는 의외로 싱겁게 끝났는데 이는 알렉산드로스가 숫적으로나 전황으로나 불리한 상황을 보고 다리우스를 직접 노리기로 하였고 이 전술이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다리우스는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알렉산드로스는 그를 노리기 위해 보병의 우익에게 명령하여 페르시아군을 최대한 밀어내게 하였다.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가 그 긴창을 이용해 잘 밀어내자 페르시아 좌익과 중앙에 약간의 틈이 생겼는데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정예기병인 헤타이로이을 쐐기 대형으로 짠 뒤 자신이 그 꼭지점에 위치한 뒤 그대로 그 틈을 통과하여 다리우스를 향해 돌진하였다. 이에 다리우스는 혼비백산하여 달아났고 최고 사령관이 도주한 것을 본 페르시아군은 혼란에 빠져 격파당하고 만다. 이 전투는 후에 망치와 모루 전술의 기반이 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 전투 후 다리우스의 어머니, 아내, 딸들을 모두 사로잡았는데 그는 이들 가족을 매우 정중하게 대우하였다고 한다. 특히 다리우스의 아내는 역사서에 당대 최고의 미녀라는 기록이 남겨진 여인인데 생포된지 일년 뒤 사산으로 목숨을 잃는다. 증거는 없으나 그 아이가 알렉산드로스의 아이라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생포된 다리우스의 두 딸 중 한명은 그대로 알렉산드로스의 아내가 되고 다른 한명은 알렉산드로스의 동성애 상대로 알려진 헤파이스티온의 아내가 된다.
이소스의 패배 뒤 다리우스 3세는 강화를 제의하는데 이 제의는 알렉산드로스가 점령한 땅을 몽땅 양보한다는 것에 자신의 가족의 몸값으로 1만 탈렌트를 지불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지금으로 치면 대략 3천억원에 해당되는 거금이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이를 거절하며 자신은 아시아의 왕이므로 영토 분할은 자신의 권한이라고 답한다. 그의 마음속엔 이미 그가 페르시아의 왕이 된 것...이때 부하 장군인 파르메니온과의 대화도 유명한데 파르메니온은 '제가 알렉산드로스 왕이면 이 강화를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하자 알렉산드로스는 '내가 파르메니온이었으면 그랬겠지'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수스의 패배로 인해 시리아는 완전히 무방비로 노출되었고 알렉산드로스는 이 지역을 휩쓴다. 다음 해에 24세가 된 알렉산드로스는 이집트로 남하하였는데 이때 티레와 가자와 같은 도시들은 격렬하게 농성을 하였으나 모두 격파되고 이들 도시의 시민들은 모두 노예로 팔리고 만다. 도시 티레의 공성전은 지금도 회자될 정도로 유명한데 알렉산드로스는 이 공성전을 직접 지휘하면서 그가 회전 뿐만 아니라 공성전에서도 대단한 능력을 지닌 무결점 지휘관임을 입증하였다. 티레는 섬에 위치한 도시였는데 알렉산드로스는 이를 공략하기 위해 인공 길을 바다위에 만들고, 50미터에 해당되는 공성탑을 건설하고, 배에 공성충차를 실어 성벽을 타격하는 등 온갖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면서 이 도시를 점령하는데 성공한다.[9] 이때 또다른 대도시인 예루살렘은 성문을 열고 알렉산드로스에게 즉각 항복하였는데 이는 페르시아에 대한 유대인의 반감때문에 그리하였다고. 로마 시대의 역사가인 요세푸스가 기록하길 알렉산드로스는 이때 다니엘 서를 접하고 이 서에 알렉산드로스가 그가 아시아를 제패하고 그의 사후 나라가 네개로 갈라질 것이라는 예언을 전해들었다고 하는데 이는 창작일 가능성이 높다.
이집트에 도착한 알렉산드로스는 그가 필리포스의 아들이 아닌 아몬 신의 아들이라는 신탁을 받는다. 그는 이 신탁을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는데 자신이 제우스 신의 아들(그리스 인들에게 제우스 신은 아몬과 동일 신으로 여겨졌다.)이라는 출생의 비밀이 밝혀진 것을 기념하는 동전[10]까지 발행한다. 하지만 이러한 행각은 마케도니아 장군들을 곤혹스럽게 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들 대부분이 알렉산드로스의 아버지 필리포스에 의해 발탁된 자들이기 때문이었다.
다음해에 25세가 된 알렉산드로스는 이집트에서 나와 동쪽을 향해 진군한다. 다리우스 3세는 자신의 모든 역량을 짜내 모은 9만 여의 병력을 이끌고 가우가멜라라는 곳에서 알렉산드로스에 맞선다. 이 전투에서 다리우스는 이수스때처럼 알렉산드로스가 자신에게 돌진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한 부대의 정예기병으로 알렉산드로스의 헤타이로이를 견제하도록 한 뒤 자신의 우세한 병력으로 마케도니아 군을 찌부려뜨리는 전술을 짠다.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헤타이로이 부대가 견제당하는 것을 알고 일부러 우익 끝까지 이동하여 페르시아의 별동대를 중앙에서 멀어지게끔 유인한다. 중앙군을 남기고 우측이 떨어져나가자 중앙군의 옆에 틈이 생겼고, 필연적으로 다리우스의 위치가 노출되었다. 이때 우익으로 유인된 헤타이로이를 견제하는 임무를 맡은 페르시아 기병은 우익 뒤편에 위치하고 있었던 마케도니아 보병의 공격에 붙들리게 되었고 이와 동시에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헤타이로이 기병은 그 견제에서 벗어나 방해받지 않고 다리우스를 향해 돌진하였다. 이수스 때처럼 다리우스는 또다시 공황에 빠져 달아났는데 이로 인해 승부가 또 결정되고 말았다.
이소스 때와 마찬가지로 가우가멜라 전투에서도 다리우스가 도망치기 전까진 페르시아군이 꽤 우세하였는데 특히 마케도니아의 좌익은 붕괴되기 직전이었다. 따라서 다리우스가 죽음을 각오하고 알렉산드로스의 돌진에 과감히 대항하였으면 그토록 어이없게 패배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리우스는 꽤 겁이 많은 성격을 가졌는지 조금만 위협받으면 바로 도망쳤는데 그로써 알렉산드로스에게 손쉬운 승리를 선사한다.
이렇게 다리우스의 겁이 많은 성격은 전투시 가장 선두에 서는 알렉산드로스와 대조된다. 알렉산드로스는 아예 한술 더떠 이소스나 가우가멜라 전투에선 헤타이로이 기병대를 쐐기 대형으로 짠뒤 자신이 그 꼭지점의 끝에 자리잡고 적진을 항해 돌격하였다. 쐐기 대형의 꼭지점 끝은 당연하게도 사망할 확률이 제일 높은 위험한 자리이다.[11]
물론 이러한 위험한 행동은 마케도니아 군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켰는데 특히 직접 지휘받는 헤타이로이의 사기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높았다. 왕이 직접 가장 선두 끝에서 돌격을 이끄는데 누가 용기를 얻지 않겠는가? 그 때문에 헤타이로이 기병은 전투시 대단히 용맹하였고 그 때문에 그들이 이소스, 가우가멜라 전투의 승부를 결정짓는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가우가멜라의 패배로 다리우스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이제 페르시아는 재기불능이 된 것이었다. 가우가멜라에서 동원한 병력은 다리우스가 동원할 수 있는 마지막 군대였다.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를 꼭 사로잡고 싶었기 때문에 도망가는 다리우스를 맹추격한다. 그러나 다리우스는 달아나는 것에 탁월한 재능이 있는지 단숨에 자그로스 산맥을 돌파한 뒤 동쪽으로 자취를 감춘다. 다리우스를 놓힌 알렉산드로스는 대신 남하하여 바빌론에 입성한다.
바빌론을 방문한 뒤에 알렉산드로스는 수사에 입성한 뒤 다시 동쪽으로 진군하여 페르세폴리스에 진입한다. 페르세폴리스에서 알렉산드로스는 크세르크세스의 거대한 석상을 때려부순다. 뒤이어 페르세폴리스에 큰 화재가 발생했는데 이는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전쟁때 아테네를 불태운 것에 대한 복수로 고의로 방화했다는 설이 있다.
또 다른 설로는 왕궁에서 창녀들을 데리고 파티를 벌이던 중, 타이스라는 이름의 한 창녀와 내기를 벌이다 불을 놓는 바람에 페르세폴리스가 전소되어 괴멸했다는 것이 있다. 페르시아의 후예라 자부하는 이란에서는 거의 정설로 믿고 있는 듯. 다른 설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하인 프톨레마이오스의 애인을 유혹할 속셈으로 페르세폴리스에 불을 놨다는 이야기도 있다. 혹은 실수였다는 설도 있고 바빌론을 수도로 삼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랬다는 설도 있으나 영국 BBC에서 만든 알렉산드로스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방화의 흔적을 발견했다고 한다. 적어도 우발적인 방화는 아니라는 것.
페르세폴리스를 점령한 뒤 알렉산드로스는 계속 동쪽으로 진군하여 다리우스의 추격에 나선다. 이때 알렉산드로스는 추격하는 대신 페르세폴리스에서 페르시아를 정복했다고 선언한 뒤 외교를 통해 페르시아 태수들을 회유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리우스를 생포하는 것에 집착하였는데 그 이유는 다리우스에게 정식으로 양위를 받아 페르시아 황제가 되려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었다.
다리우스는 동쪽으로 달아나 다시 한번 병력을 모아 알렉산드로스와 대결하려고 생각하였으나 이미 다리우스에 대해 진절머리가 난 부하들이 다리우스를 배신하여 그를 사로잡는다. 이 반란을 지휘한 자의 이름은 베수스였는데 그는 다리우스의 친척이자 다리우스 외엔 가장 왕위 계승권에 가까운 유력 영주였다. 그는 다리우스의 지휘 능력에 대해 전혀 신뢰하지 않았고 이것은 다른 다리우스의 부하들도 마찬가지였는데 이에 따라 베수스는 다리우스에게 자신이 다리우스 대신 군대를 지휘하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알렉산드로스를 이긴 뒤 다리우스에게 지휘권을 돌려주겠다고 말하였다. 다리우스는 이를 거절하였고 그러자 베수스와 그를 지지하는 장교들은 다리우스를 포로로 잡는다. 베수스는 다리우스를 소가 끄는 우마차 감옥에 억류해 두었는데 그때 알렉산드로스가 그의 작은 규모의 호위군과 함께 근처에 당도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혼란에 빠진 베수스는 달아났는데 이때 감옥에 있던 다리우스를 찌르고 달아났다. 알렉산드로스가 다리우스를 발견하였을때 다리우스는 이미 죽은 상태였고 따라서 꼭 생포하고 싶었던 알렉산드로스는 대단히 실망하였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를 페르세폴리스로 보내 매우 정중하게 장사지낸 뒤 베수스를 잡으려고 동쪽으로 계속 진군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가 숨이 끊어지기 직전 자신에게 페르시아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유언했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이 페르시아의 새로운 왕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베수스는 페르시아 왕국의 반란자이므로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의 왕으로써 이를 진압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 때문에 알렉산드로스는 그를 쫒아 동쪽으로 계속 행군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동쪽으로 행군하면서 수많은 신도시를 건설하였고 이들을 모두 알렉산드리아라고 명명한다. 이 알렉산드리아들은 알렉산드로스가 꿈꾼 완벽하게 이상적인 도시를 만들기 위한 일종의 시험작들이라고 추측된다. 실제로 이 도시들은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과 문화가 어울리도록 조치하였고 그에 따라 당시 서방에서 모을 수 있었던 거의 모든 문헌을 수집 배분하여 도서관을 설치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는데 당시에 있어서 책의 가치를 생각해본다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이러한 생각이 얼마나 시대를 앞서간 것인지 알 수 있다.[12] 헬레니즘 문화의 발흥도 바로 이러한 배경에 의한 것이다.
세계 방방곡곡에 건설되었던 알렉산드리아는 모두 폐허가 되어 위치조차 알 수 없고, 현재까지 유일하게 살아남은 곳이 바로 이집트 제2의 도시인 알렉산드리아다. 터키의 항구도시인 이스칸데룬(Iskenderoun 또는 Iskenderun) 역시 그리스어로는 알렉산드렛타라고 불리며, 스스로는 알렉산드리아의 후신이라 주장하고 있으나 학계에서는 멸망한 뒤 같은 위치, 혹은 인근에 세워진 새로운 도시라는 설이 유력하다.
알렉산드로스는 동쪽으로 행군하여 마침내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지역까지 오게 된다. 이 지역에서 베수스를 보호하고 있었던 사고디안 부족장인 스피타메네스는 베수스를 알렉산드로스에게 넘겨주고 강화를 맺기로 결정하였다. 사고디안 부족은 지금의 아랄해와 인도 국경 사이에 살고 있던 부족이었다. 베수스를 넘겨받은 알렉산드로스는 그의 코와 귀를 자르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는데 이는 페르시아가 반란자를 처형하는 전통적인 방식이었다.
이 지역에서 알렉산드로스는 스키타이 부족과 전투를 치루었는데 사고디안 부족은 베수스를 넘겨주고 강화를 맺은 것을 백지화 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를 모두 진압하였고 사고디안 부족은 이를 주동한 그들의 부족장인 스피타메네스를 죽이고 알렉산드로스와 강화를 맺는다. 사고디안 부족을 격파한 뒤 알렉산드로스는 박트리아 지역을 공략하였는데 박트리아는 지금의 히말라야 산맥 서쪽 지역으로 인도와 꽤나 가까운 곳이다. 이 지역에서 알렉산드로스는 록사나라는 박트리아 귀족 출신의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는데 그녀는 알렉산드로스의 첫번째 아내였다.
이때 알렉산드로스에 대해 여러 차례 암살 시도가 일어났었는데 놀랍게도 이러한 음모를 주도한 것은 모두 알렉산드로스의 마케도니아 장교들이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왕이 되었음을 선언한 뒤 페르시아 식의 궁중예법을 자신의 부하들에게 강요했기 때문이었다. 페르시아 예법대로라면 알렉산드로스를 만나려면 시종의 허가를 받아야 했으며 만나서는 우선 반지에 키스를 해야 했는데 마케도니아 장군들에게 있어 이러한 짓은 지나치게 비굴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알렉산드로스는 관을 쓰고 페르시아 궁중복을 입으며 비위를 잘 맞춰주는 페르시아인들을 가까이에 두었었다. 게다가 논공행상 할 때도 많은 페르시아인들에게 높은 지위를 주었는데 마케도니아 장군들의 입장에서 많은 피정복민들이 그들과 동등한 직책을 맡은 것을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13]
이때 마케도니아의 장군이자 알렉산드로스 다음가는 사령관인 파르메니온은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암살당했는데 그 이유는 그의 아들 필로타스가 알렉산드로스 암살 음모에 가담했기 때문이었다. 알렉산드로스가 파르메니온의 아들 필로타스를 고문한다음 죽인 뒤 파르메니온의 군인들에게서 받고 있는 높은 신뢰는 알렉산드로스로 하여금 그를 매우 경계하게 하였으며 그 때문에 암살한 것. 일찍이 알렉산드로스를 페르시아로 건너온 뒤 벌인 첫번째 전투인 그라니쿠스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의 생명을 구한 바가 있는 클레이투스도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클레이투스는 알렉산드로스를 구한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나 알렉산드로스와의 오랜 친구이기도 했는데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황제스러운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해 매우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때 마케도니아 장군들의 접근을 거의 허가하지 않았는데 어느날은 모처럼 그들을 모아놓고 술자리를 벌였다. 그는 모인 장군들에게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며 이는 자신의 아버지인 필리포스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페르시아 출신의 악사가 페르시아의 승리와 마케도니아의 패배를 뜻하는 노래를 불러 그것을 알렉산더가 좋게 듣자 마케도니아 장군들이 불편해하다가 갑자기 클레이투스가 화를 내면서 분위기를 제대로 망친다. 클레이투스나 알렉산드로스 모두 이때 매우 취한 상태였는데 클레이투스는 이에 격분하여 알렉산드로스와 악사에게 맹비난을 퍼부우며 알렉산드로스의 업적은 그의 아버지인 필리포스 덕택이며 이것을 잊어선 안된다고 말하였는데 이는 필리포스를 생까며 자신은 제우스의 아들이라는 것에 도취된 알렉산드로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였다. 주변 사람들도 '이 사람이 미쳤나'하고 생각하여 그만하라고 했지만 클레이토스는 말을 안들었다.
알렉산드로스와 신하들은 클레이투스를 내쫒으라고 명령하였으나 원래부터 거칠어서 술취하면 더심해지는 클레이투스는 근위병들한테 끌려가면서도 계속 불평을 토로하여 화를 자초한다. 가뜩이나 술취한데다 불평이 폭언이나 다름없는지라 분노한 알렉산드로스는 창을 가지고[14] 클레이투스를 꿰뚫어 죽인다.[15] 당연히 사람들은 멘붕했고 왕 역시 패닉에 휩싸여 자살하려고 하자 놀란 신하들과 근위병들이 제지해서 방으로 끌고 갔다. 알렉산드로스는 다음날 술에 깬 상태에서 클레이투스를 죽인 것에 매우 후회하였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 며칠동안 죄책감이랑 슬픔으로 폐인까지 되는 바람에 신하들이 설득해서 겨우 정신을 차릴수 있었다. 그렇게 마케도니아 장교들과 알렉산드로스의 불화는 점점 심해져가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런 상황에서도 계속 원정을 희망하였고 우선 인더스 강 서쪽, 지금의 파키스탄 서쪽 지역에 있던 지방 영주들을 소환하여 자신을 따르는 것을 보이라고 명령하였다. 많은 영주들이 이에 응해 알렉산드로스에게 나아갔으나 몇몇 영주들은 거부하였다.그러자 알렉산드로스는 그들을 반역자로 간주해 군대로 공격한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러는 동안 심한 부상을 입기도 하였으나 그들을 모두 공략하는데 성공하였고 그에게 부상을 입힌 도시 시민들은 모두 학살당하고 건물 기초까지 부숴 완전히 폐허로 만든다. 그래서 지방 영주들은 알렉산드로스를 두려워하여 알아서 기어들어왔다.
알렉산드로스는 파키스탄 지역을 공략한 뒤 인더스 강을 건너 인도 지역까지 공격하기로 하였는데 그렇게 한 이유는 동쪽 대륙의 끝까지 정복한 뒤 그 대륙의 끝자리에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을 남기고 오겠다는 다소 허황된 계획 때문이었다. 그는 인더스 강을 건넌 뒤 남쪽에 위치한 파우라바라는 나라를 공격하였는데 이에 파우라바의 왕 포루스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왔다. 알렉산드로스는 대략 4만여 병력이었고 포루스는 5만여 병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들은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한다. 알렉산드로스는 병력의 일부를 본 진영에 남겨 대군이 머무르는 것처럼 위장한 뒤 밤에 몰래 강의 상류로 올라가 강을 건넜다. 포루스는 이에 주력을 이끌고 상류로 올라가 강을 건넌 알렉산드로스와 싸웠는데 알렉산드로스는 우세한 기병(7천대 4천)으로 포르스의 기병을 격파하는데 성공하고 배후로 돌아가 포르스의 보병을 팔랑크스와 협공하는데 성공한다. 포르스는 용감하게 싸우다 결국 항복하였고 포루스의 용맹함을 높이 산 알렉산드로스는 그를 왕위에 그대로 앉히고 그가 알렉산드로스에게 충성하겠다는 약속을 받은 선에서 그를 풀어준다.
포루스를 격파하여 인더스 강 남쪽에 교두보를 확보한 알렉산드로스는 이때 자신의 죽은 애마인 부케팔로스[16][17]의 이름을 딴 부케발리아라는 도시를 건설한 뒤 이번엔 갠지스 강을 건너 인도 본토에 침입할 계획을 세운다.
이때 겐지스 강 남쪽엔 난다 왕조가 존재하고 있었는데 이 왕조는 포루스의 파우라바와는 달리 거대한 국가였다. 이 국가는 인도 북부를 통채로 지배하고 있었다. 포르스의 부하들은 마케도니아인들에게 난다 왕조의 군사력을 말해주었는데 이들은 20만 보병, 6만 기병, 8천 전차대, 6천개의 코끼리 부대가 갠지스 건너편에 있다고 말하였다.
이런 사실을 들은 데다 너비가 6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강인 베아스 강을 건너야 한다는 점도 있어 병사들은 알렉산드로스가 난다 왕조를 공격하는 것에 대해 강하게 반대하였다. 이들을 파업을 벌였고 알렉산드로스는 이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온갖 애를 써보지만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결국 서쪽으로 군대를 철군하기로 하였다. 이 회군 과정은 거의 참사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바빌론에 도착했을 때 남은 병력은 인도에서 출발한 병력의 1/10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보급을 담당한 함대가 인도양의 몬순에 바다 멀리 밀려가 버린 사고 때문이다. 그 때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대는 게드로시아(현대의 발루치스탄) 사막을 지나고 있었다. 병사가 알렉산드로스에게 떠다준 물을 나만 마실 수 없다고 쏟아버렸다는 일화가 바로 이 사막 행군 중의 일이다.
인도 원정에서 되돌아온 알렉산드로스는 수많은 관료들이 부정축재를 한 것을 발견하였다. 이 관료들은 알렉산드로스의 성격을 볼 때 이토록 빨리 원정을 중단하고 병사들이 파업할 줄 누가 알았을까? 귀국할 줄은 예상못했고 또한 그들의 많은 자들은 알렉산드로스가 원정 도중 전사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마음껏 부정축재를 벌인 것인데 이들 많은 수가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처형당한다.
알렉산드로스는 수사로 돌아가 그를 따라 종군했던 마케도니아 군에게 많은 급료를 주고 그들의 빚을 모두 대신 갚아 준 뒤 마케도니아로 귀국하라고 하였다. 이렇게 한 이유는 마케도니아 군이 인도에서 파업을 벌였을 때 내세운 표면적 명분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기 때문...그러나 이것은 알렉산드로스가 오해한 것으로 사실 이들이 원한 것은 전쟁을 그만두고 싶은 것이었지 마케도니아로 가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들은 알렉산드로스 곁에 머물며 정복자로써의 혜택을 누리고 싶었지 얼마간의 퇴직금만 받고 마케도니아로 되돌아가 실업자 신세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들은 오피우스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들에게 직접 나아가 이들을 꾸짖고 몇몇 주동자를 처형하라고 지시한다. 그러자 마케도니아 군인들은 밤에 알렉산드로스가 있는 막사를 포위한 뒤 동틀때까지 목놓아 울었는데 결국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계획을 철회하고 이들을 모두 용서한 뒤 이들 전원에게 자신의 '일족'이라는 칭호를 부여하는 영예를 주고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이들과 함께 주연을 즐긴다. 알렉산드로스는 그 뒤 마케도니아인들의 반발이 자신의 친페르시아 행보 때문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마케도니아인들과 페르시아인들을 융화시키기 위해 그 두 인종간의 집단 혼인식을 치르게 한다. 이때 페르시아 여자와 결혼한 마케도니아 남자의 수는 무려 1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18] 알렉산드로스도 모범을 보이기 위해 이수스때 사로잡은 다리우스의 큰딸과 결혼한다.
이렇게 한 뒤 알렉산드로스는 친구 헤파이스티온의 죽음을 알게 되었는데 그는 이로 인해 대단한 상실감에 빠지게 되었다. 그 뒤 얼마 안있어 알렉산드로스도 쓰러졌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고작 32세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쓰러질 전까지 건강에 아무런 이상이 없었고 젋었기 때문에 아랍 원정[19]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쓰러진 것이었다. 쓰러지기 직전 알렉산드로스는 해군 제독이었던 네아르코스와 파티를 한 뒤 아침이 될때까지 술을 퍼마셨었다. 그 뒤 알렉산드로스는 몸에 열이 나기 시작하였는데 그 고열은 계속되었다.
일주일 후 알렉산드로스는 말을 할 수 없게 되었고[20] 그 다음날 마케도니아 군인들은 알렉산드로스의 건강에 무엇인가 이상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알렉산드로스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들 중 지위가 높은 몇 명만 만났는데 이때 알렉산드로스는 이들을 반기기 위해 간신히 손을 들어올릴 수 있을 뿐이었다. 이틀 뒤 알렉산드로스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추측이 있는데 일각에서는 암살설[21]을 제기하기도 하고, 너무 젊은 시절에 이룰 걸 다 이뤄서 의욕상실로 병에 걸려 죽은 거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그리고 다른 학설에서는 죽기 전에 포도주를 6.5리터 가량(그것도 원액)을 들이켜 마셔서 사망했다고도 한다.[22] 헤파이스티온도 과음 때문에 죽었다는 설이 있다. 그 외에 열병을 빨리 치료하기 위해 독성이 강한 약을 한꺼번에 너무 많이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신빙성은 거의 없는 야사이긴 하지만, 어느 지역에서 그에게 여자를 진상했는데, 그 여자가 소위 말하는 독인(어릴때부터 독을 먹여서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독살이 가능하다는 사람)이어서 그 여자를 안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는 설도 있다. 가장 유력한 학설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모기에 물리는 바람에 일종의 풍토병인 말라리아 감염설이 있고, 실제로 고대의 독살설이 제기되는 사람들 대부분은 동방의 풍토병이 의심되는 증세를 보이며 사망했다는 점 때문에 말라리아가 의심되곤 한다. 말라리아 감염설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사망원인을 분석하자면 이렇다.
원정을 갔다. → 직접 병력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면서 지휘했다. → 네아르코스와 파티를 하면서 술을 퍼마셨다. → 술을 퍼마시는 도중 모기에게 물렸다. → 모기가 갖고있던 말라리아에 감염되어 죽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죽음이 워낙 급작스럽고 또한 그가 젋은 나이였으므로 그는 후계에 대한 대비를 전혀 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때 록사나는 임신 중인 상태였는데 그녀의 뱃속의 유복자가 알렉산드로스의 유일한 아이었다. 알렉산드로스의 마케도니아 장군들은 회의를 열어 이 아이가 사내아이로 태어날 경우 왕으로 삼자고 합의하였다. 그러나 마케도니아 보병들은 그들이 이 회의에서 배제되었다는 이유로 이 합의를 거부하고 알렉산드로스의 배다른 동생으로 간질을 앓고 있던 필리포스를 왕으로 추대한다.[23] 나중에 록사나가 결국 사내아이 알렉산드로스(알렉산드로스 4세)를 낳자 양측은 합의하여 이 아기와 필리포스를 공동 왕으로 추대하였다. 하지만 간질 환자와 갓난아기였던 이 둘은 허수아비, 꼭두각시, 괴뢰로 아무런 실권이 없었다.
알렉산드로스가 죽기 직전에 유언으로 가장 강한 자가 자신의 후계자라고 했다는 설이 있다. 로마 시대의 역사가인 디오도루스가 그 출처이지만 그와 함께 알렉산드로스 시대 역사의 주요 소스인 아리아노스와 플루타르코스는 모두 알렉산드로스가 말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의 사후 마케도니아 제국은 이 유언 그대로 되고 말았다. 그의 부하들 중 가장 강한 자들이 나라를 나눠 가졌으니...
여담이지만 이를 두고 성서의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숫양과 숫염소에 대한 계시가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다리우스 대왕을 비유한 것이라는 해석을 하는 종파도 있다.[24] 일단 날개 달린 표범처럼 빠르게 영토를 넓혔고, 후에 4개의 나라로 분열되었기 때문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