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立處皆眞). 중국 당나라 때 선승 임제가 한 말로 '어느 곳에 있든 주인이 되면 그곳이 불국토'라는 뜻의 한자성어다. 어떤 환경에서든지 주체적으로 산다면 그곳의 모든 것이 진짜 자신의 삶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할 때 쓰인다. 자신의 뿌리를 떠나 낯선 곳에서 일가를 이룬 이들이라면 이 말이 더욱 와닿을 것이다. 지금 소개하는 여섯 사람처럼 말이다. 해외입양아 출신으로 타국에서 당당한 주인이 된 사람들의 얘기를 모았다.
장 뱅상 플라세 프랑스 장관
2016년 5월 17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제7회 아시안리더십콘퍼런스'에 참여한 왼쪽부터 쉐란 칭화대 공공정책 대학원장, 장 뱅상 플라세 프랑스 국가개혁장관의 모습. 콘퍼런스에는 제니 시플리 전 뉴질랜드 총리와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전 그리스 총리도 참여하였다. /조선DB 프랑스 국가개혁 담당 장관 장 뱅상 플라세(Jean Vincent Place)는 한국에서 태어나 1975년 일곱 살 때 프랑스로 입양된 한국계 프랑스인이다. 그는 회계사로 일하다 녹색당에 들어가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프랑스 언론과 국내에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건 2010년 녹색당 사무부총장을 하면서부터다. 이듬해 한국인 입양아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프랑스 상원의원에 당선되면서 그의 정치 행보에 관심을 갖는 이가 늘어났다.
한국명은 권오복. 입양서류에 적힌 출생연도는 1968년이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경기도 수원의 한 보육원에서 생활하던 그는 일곱살이 되던 해, 성경책과 옷 몇 벌을 가지고 프랑스 행 비행기를 탔다. 도착한지 석달만에 불어를 깨쳤다. 변호사였던 양아버지와 교사였던 양어머니 밑에서 안정적으로 프랑스 사회에 적응하며 어린시절부터 정치인을 꿈꿔왔다.
2014년 펴낸 자서전 '내가 안 될 이유가 없지!'에서 그는 "25세 때 나는 마흔 이전에 국회의원이 되는 꿈을 꿨다. 이런 인생 계획을 화장실 벽에까지 걸어 뒀다"고 밝혔다. 지금은 한국어를 다 잊어버렸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버린 한국에 냉담한 감정을 품었다는 플라세 의원은 2013년 딸이 태어난 뒤 한국에 대한 시각이 바뀌었다고 했다.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딸과 함께 한국어를 배울 생각이다. 만약 딸이 원한다면 (한국에서) 자신의 뿌리를 찾는 것을 돕고 싶다"고 말했다.
플뢰르 펠르랭 前 프랑스 장관
2013년 3월 25일, 서울 노보텔 호텔에서 열린 한불 상공회의소 주관 행사에 참석해 '혁신적인 성장을 위한 중소기업 협력'을 주제로 강연하고 있는 플뢰르 펠르랭 당시 프랑스 중소기업·디지털경제·혁신장관. /조선DB 한국계 입양아 출신으로 처음으로 장관에 오른 플뢰르 펠르랭(Fleur Pellerin). 2012년 프랑스 대선 때 올랑드 캠프에서 디지털 선거운동을 지휘한 경험을 바탕으로 중소기업·디지털 경제 장관에 임명됐다.
1973년 생후 6개월만에 프랑스에 입양된 그녀는 교육을 못 받은 양어머니의 한(恨)을 대신 풀려고 억척스레 공부해 열여섯 살에 대입자격시험 바칼로레아에 합격했다. 최고 엘리트만 가는 국립행정학교(ENA)를 나와 감사원에서 일했다. 2002년 사회당 대선 캠프에서 연설 문안 작성에 참여하며 정치에 발을 들여놓았다.
장관 임명 후 처음으로 한국 언론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는 "한국의 큰 관심에 놀랐고 자부심을 갖는다"며 "한국 문화를 좀 더 알고 싶지만, 친부모나 친척 등 뿌리를 꼭 찾아야겠다는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2013년 3월 입양 후 처음 한국을 방문했다. 당시 펠르랭은 "지하철에서도 자유롭게 인터넷을 하는 것이 무척 인상 깊다"고 말했다. 이후 한국 IT 기업과의 업무 제휴에 적극 나섰다. 현재 장관직에서 물러난 그는 한국 기업의 프랑스 투자를 돕는 기업 '코렐리아'를 설립했다.
조아킴 송 포르제 프랑스 하원의원
/연합뉴스, 조아킴 송 포르제 트위터 캡처 18일(현지 시각) 주스위스 프랑스 영사관에 따르면 이날 치러진 프랑스 총선 결선 투표에서 스위스·리히텐슈타인 지역구에 출마한 조아킴 송 포르제(34)가 74.8%의 득표율을 기록해 하원의원으로 당선됐다. 그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올해 창당한 '레퓌블리크 앙마르슈'(전진하는 공화국) 후보로 이번 총선에 출마했다.
프랑스는 재외 국민의 권익을 대변하기 위해 2010년 해외선거구 제도를 도입, 전체 하원 의석 577석 중 11석을 해외 선거구로 배정하고 있다. 그는 당초 지난 4일 열린 1차 투표에서 63.21% 득표율을 얻었으나 전체 투표율이 25%를 넘지 못해 결선 투표를 치러야만 했다.
포르제는 생후 3개월 때인 1983년 7월 서울의 한 골목길에서 순찰 중인 경찰에게 발견됐다. 옷에는 생일이 '4월 15일'이라고 적힌 쪽지만 들어 있었다. 이후 아기는 고아원과 위탁 가정으로 보내졌고, 태어난 지 9개월 만에 프랑스 북동부에 있는 작은 도시 랑그르의 한 가정에 입양됐다.
르탕지에 따르면 포르제는 어렸을 때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해 집에서 공부를 했다. 과학과 음악에 재능을 보인 그는 프랑스 파리의 명문 대학인 파리고등사범학교(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에서 인지과학을 전공한 뒤 2008년 스위스로 건너가 의학을 공부했다. 포르제는 개인 블로그에 자신의 한국 이름을 '손재덕'이라고 소개했고, 한복을 입은 사진을 올려놓기도 했다. 포르제는 블로그에 입양아의 정체성 혼란에 관한 글도 썼다. 그는 작년 6월 학회 참석차 서울을 방문한 적이 있다.
예시카 폴피에르 스웨덴 국회의원
/예시카 폴피에르 페이스북 캡처 지난 6월 1일 제주에서 열린 세계 한인 정치인 포럼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예시카 폴피에르(Jessica Polfjärd)는 스웨덴 온건당 국회의원이다. 18세부터 온건당 청년 조직에서 정치를 배우기 시작해 20세에 시의회 의원이 됐고 35세에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그의 한국이름은 '김진달래'. 김진달래는 보육원에서 봄에 태어났다고 붙여준 이름이다. 1971년 서울의 한 경찰서 앞에서 버려진 채 발견돼 보육원에 맡겨졌다가 이듬해 스웨덴으로 입양됐다.
인구 15만명의 작은 도시인 베스테로스주에서 자란 그는 "당시엔 스웨덴에 이민자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같이 입양된 여동생과 나는 당연히 눈에 띄는 존재였다"고 했다. '어디서 왔냐'는 질문에 답할 때마다 불편함은 느꼈지만 심각한 차별은 겪지 않았다. 한국 방문이 두 번째라는 그는 "처음 한국에 도착해 택시를 탔는데 '40년 전 입양될 때도 이 길을 지났겠구나' 싶어 기분이 이상했다"고 했다.
훈영 합굿 미시간 상원의원
/훈영합굿 공식 홈페이지 훈영 합굿(Hoon Yung Hopgood)은 2010년 상원의원에 당선, 미시간주에서 활동하고 있다. 합굿 의원은 1974년 인천에서 태어나 보육원에 맡겨졌다가 1976년 미국의 교육자 집안에 입양됐다. 미시간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미 최대 노조단체인 '산별노조총연맹'에서 일했고, 민주당 하원의원 정책보좌관 등으로 근무하다 2002년 주 하원 입성에 성공한 후 3선을 지냈다.
그는 2011년 민족사관고 강연에서 백인 중심 미국사회에서 정치인이 될 수 있었던 것에 대해서 "교육자이신 양부모님 덕입니다. 제게 교육이 모든 역경을 극복할 힘을 준다는 신념을 주셨죠. 여러분도 그런 신념을 갖길 바랍니다."고 밝혔다. 그는 1998년 친부모를 찾으려고 처음 한국에 왔지만 찾지 못했다.
폴 신 前 워싱턴주 상원의원
2010년 2월 8일, 서울 하얏트 호텔에서 유년 시절 거지 생활을 하다가 미국으로 입양돼 워싱턴주 상원 부의장에 오른 신호범 의원(왼쪽)과 그의 인생을 소재로 영화, 드라마, 다큐멘터리 제작에 나선 고석만 감독의 모습. /조선DB, 연합뉴스 2014년 정계 은퇴를 선언한 폴 신(Paull Shin) 상원의원은 19세 때 입양된 경우다. 1936년 경기 파주시 금촌에서 태어난 그는 4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6세에 가출해 서울역 인근에서 거지 생활을 했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트럭을 타고 가던 미군들에게 "초콜릿 좀 달라"고 쫓아가다가 트럭에 올라탄 뒤 미군 부대에서 하우스보이로 일하게 됐다. 그의 성실한 태도를 눈여겨본 미 군의관 레이 폴 박사가 열아홉의 그를 입양해 1955년 미국으로 데리고 갔다.
무학(無學)이었던 신 의원은 하루에 3시간밖에 자지 않으며 독하게 공부했다. 독학으로 중·고교 과정을 마친 후 브리검영 대학을 졸업하고 펜실베이니아대에서 국제관계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74년엔 워싱턴주립대에서 동아시아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에 온 지 19년 만에 이룬 성과였다.
그는 메릴랜드대와 하와이대에서 교수로 재직하다 1992년 정계에 입문, 미국 내 한인 권익 보호를 위해 많은 활동을 해왔다. 신 의원은 미국에서 인종차별 해소를 위해 헌신한 노력을 인정받아 2003년 '미국 최고 해외 이민자상'을 수상했다.
2014년 앓고 있던 알츠하이머 증상이 심해지자 "건강상의 문제로 즉각 의원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Wants to sail 항해하고 싶다 / Christos Lamprianid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