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星創業主 李秉喆 會長
< 他界 한달 前 天主敎에 24個項 綜敎 質問 >
24 항의 질문에 ( 1~~3 ) 만 옮겼습니다
첫 질문은 둘러가지 않았다. 바로 과녁의 정 중앙을 향했다. “신이 있는가. 있다면 왜 나타나지 않나.” 역사 속에서 수 없는 무신론자가 던졌을 물음이다. 무신론자뿐만이 아니다. 수많은 유신론자도 기도 속에서 묻고, 또 물었을 것이다. 이 회장의 첫 질문은 그렇게 단도직입적이었다.
“우리 눈에는 공기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공기는 있다. 소리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감지할 수 있는,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의 영역이 정해져 있다. 가청영역 밖의 소리는 인간이 못 듣는다. 그러나 가청영역 밖의 소리에도 음파가 있다. 소리를 못 듣는 것은 인간의 한계이고, 인간의 문제다. 신의 한계나 신의 문제가 아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가령 개미와 코끼리를 보라. 개미는 이차원적인 존재다. 작고, 바닥을 기어 다니는 개미에겐 평면만 존재한다. 입체도 개미에겐 평면이 된다. 그런 개미가 코끼리 몸을 기어 다닌다. 개미는 코끼리 몸을 느낀다. 그러나 코끼리의 실체를 파악하진 못한다. 왜 그런가. 개미의 인식 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게 코끼리가 없기 때문이 아니다.”
●결국 개미는 코끼리를 모르는 건가.
“아니다. 개미는 코끼리를 느낀다. 코끼리의 부위에 따라 다른 질감을 느낀다. 신과 인간의 관계도 비슷하다. 인간도 그렇게 신을 느낀다. 우리가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할 뿐이다. 신은 자신의 존재를 우리가 아는 방식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신은 이미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현대 물리학에선 우주의 차원을 11차원이라고 한다. 신이 존재한다면 그 너머의 차원까지 관통할 것이다. 3차원적 존재가 11차원적 존재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겠나. 흑백TV로 3D컬러 영상물을 수신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성경에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돼 있다. 신약성경은 그리스어로 처음 기록됐다. 그리스어로 ‘말씀’은 ‘로고스(Logos)’다. 로고스의 뜻이 뭔가. ‘원리’다. 다시 말해 ‘존재 원리’를 뜻한다. 그러니 요한복음서의 첫 구절은 ‘태초에 존재 원리가 있었다’가 된다. 우주에는 기가 막히게 섬세한 질서가 있다. 결국 그러한 존재 원리, 그리도 섬세한 질서의 근원이 무엇인가라는 거다.”
◀ 이병철 회장의 종교에 대한 24개 물음을 담은 질문지. A4 용지 다섯 장 분량이다.
●그 근원은 뭔가.
“만물의 창조주로서 신의 존재는 ‘증명’의 문제가 아니라 ‘체험’의 문제다. 결국 우리가 어떻게 신을 만날 건가의 문제다. 만나면 증명이 되는 거니까. 그럼 신을 어디서,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가톨릭 신학생 시절, 수업 시간에 은사 신부님을 통해 고(故) 최민순(1912~75) 신부님의 일화를 들은 적이 있다. 최 신부님은 아침 수업에서 이런 시상(詩想)을 내놓았다고 한다. ‘꽃을 본다/꽃의 아름다움을 본다/꽃의 아름다우심을 본다.’ 이 구절을 듣는 순간, 제겐 충격이었다.”
●왜 충격이었나.
“우주의 철리(哲理)가 사통팔달로 뚫리는 기분이었다. 꽃의 아름다움, 나무의 아름다움, 땅의 아름다움, 하늘의 아름다움이 모두 하나의 고백이다. 변화하는 이 아름다움을,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이신 분이 아니면 누가 만들 수 있겠는가. 결국 한 송이 꽃을 통해서도 신을 체험할 수 있고, 그 체험이 자신에겐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이 되는 거다.”
이 회장의 물음은 ‘창조’에서 ‘진화’로 이어졌다. 신의 창조와 인간의 진화는 양립할 수 있을까. 아니면 철저하게 양자택일의 문제일까. 그건 신학과 물리학이 만나는 가장 현대적인 접점이기도 하다.
차 신부는 ‘다윈 탄생 200주년, 『종의 기원』 150돌, 물리학자-신부의 열린 대화’라는 대담을 중앙일보(2009년 2월 5일자 21면, 9일자 25면)에서 한 적이 있다. 차 신부는 물리학계의 거두인 장회익 서울대 명예교수와의 대담에서 “신이 인간을 빚었나?”라는 물음에 소상하게 답한 바 있다. 당시 대담 내용을 끄집어내며 차 신부는 답을 이어갔다.
“‘하느님이 실제 진흙으로 인간을 빚었다’는 이해 방식은 3차원적 사고에 갇힌 거다. 그런 생각은 신앙적으로 더 큰 잘못이다. 초월적 존재의 하느님을 인간의 3차원적 사고 안에 가두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그걸 떠나 계신 분이다. ‘신이 흙으로 인간을 빚었다’는 건 단지 은유적 표현이다. 오랜 세월에 걸친 진화의 과정을 ‘흙으로 빚었다’는 말로 축약했다고 봐도 된다. 창조론과 진화론은 대립적 관계가 아니다. 지구의 환경, 우주의 환경은 끊임없이 변한다. 신이 창조한 생명체도 변화하는 환경에서 생존하려면 끝없이 진화해야 한다. 그런 진화를 인정한다. 그러나 진화론은 창조론이란 더 큰 울타리 안에 포함된 개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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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는 히브리어로 ‘하타(Hata)’,
그리스어로 ‘하마르티아(Hamartia)’다.
‘과녁을 빗나간 상태’란 뜻이다. 과녁이 뭔가. 기준이다.
어떠한 기준을 벗어난 상태가 죄라는 얘기다.
우주에 깃든 섭리,
그런 섬세한 질서에서 벗어나는 것이 죄다.
그럼 신은 왜 우리가 죄를 짓게 내버려두실까.
그 역시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은 1000년 동안 사람의 입을 통해 구전되던 이야기를 기록한 작품이다.
이것을 짜맞추고, 모자이크해 보니 어떤 그림이 나왔다.
그 그림을 봤더니 ‘하느님 그림’이었다.
긴 세월, 여러 사람,
다양한 음성을 통해 나온 말이 어쩌면 그렇게 합치될 수 있을까.
물론 표본오차 수준의 편차도 약간 있다.
그건 성경을 기록한 사람의 어투와 성격 때문이다.
신·구약성경에는 전체 이야기를 관통하는 일관된 기조가 있다.
그걸 볼 때 성경의 원저자는 저 위에 계신 분이고, 성령이고,
이 밑에 있는 사람들이 입과 손과 가슴을 빌려준 것이라고 본다.”
천주교’란 과녁을 향하던
이 회장의 질문은 이제 ‘종교’라는 더 큰 과녁으로 시위를 돌렸다.
종교가 뭔가, 왜 필요한가,
영혼이란 뭔가, 각 종교는 무엇이 같고, 또 무엇이 다른가.
불과 서너 가지 질문에
‘종교학 개론’의 뼈대가 담겨 있다.
“벼락이나 천둥이 칠 때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신을 찾는다.
마취 직전, 수술대에 누운 이들도 기도를 한다.
무신론자도 슬픔에 직면하면 본능적으로 하느님을 원망한다.
그래서 ‘참호 속에서는 무신론자가 없다’는 말도 있다.
우리는 모두 유한한 존재다.
그래서 무한을 동경한다.
영원을 갈망한다.
그런 염원이 하나의 형식이 됐을 때 종교가 된다.”
●종교는 인간에게 왜 필요한가.
“인간은 영원을 찾다가 자꾸 벽에 부딪힌다.
부딪힐수록 무한에 대한 동경은 커진다.
결국 동경하던 무한성에 ‘신’이란 이름을 붙인 거다.
그 무한성을 인격체로 여긴 사람들이
그걸 숭배하게 되고, 도움 받기를 청하는 거다.
자신이 그 벽을 넘어설 수가 없으니까.
결국 인간은 종교라는 터널을 통해 영원을 갈망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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