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예수, 부인 있었다" vs "전혀 신빙성 없다"

청 송 2012. 9. 20. 09:00

 

"예수, 부인 있었다" vs "전혀 신빙성 없다"

입력 : 2012.09.20 03:06

캐런 킹 하버드대 교수 국제 학회서 문서 공개 논란
킹 교수 - 예수 직접 "나의 아내" 언급… 4세기 이집트 문서 근거 주장
신학계 - "발견된 콥트어 문서는 신약시대와 거리 멀어… 이단의 주장에 불과하다"

예수가 "나의 아내"라고 직접 언급했다는 4세기 콥트어(語) 문서의 파편이 공개됐다. 기독교 영지주의(靈知主義·Gnosticism) 연구자인 캐런 킹(58) 하버드 신학대학원 교수는 18일(현지시각)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국제 콥트학회에 이 문서 파편을 공개했다고 뉴욕타임스와 보스턴글로브 등 미국 언론들이 보도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영지주의 문제에 밝은 국내 신학자들은 "실증적 사료로서의 가치는 거의 없으며, 전혀 새로울 것도 없는 해프닝"이라며 "신학적으로 논쟁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는 냉담한 반응이다.

◇"'나의 아내' 언급 있다"

보도에 따르면 킹 교수는 "정확한 입수 경로는 밝힐 수 없다"며 공개한 콥트어(이집트 토착어) 문서 파편에 스스로 '예수의 아내 복음(The Gospel of Jesus' Wife)'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신용카드 정도 크기의 이 문서의 문구들은 문장으로서 완성되지 않은 형태다. "내게는 아니다. 내 어머니가 내게 생명을 주었다" 등 맥락 없는 단어가 나열된 가운데 "나의 아내"라는 언급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킹 교수는 NYT에 "이것이 예수가 결혼했다는 증거라고 할 수는 없다"면서도 "예수가 직접 '나의 아내'라고 언급한 문서가 발견된 것에 크게 흥분했다"고 말했다.

하버드대 신학부 캐런 킹 교수가“예수가 직접‘나의 아내’를 언급한 문서”라며 콥트어 파피루스 파편을 들어 보이고 있다(왼쪽 사진). 신용카드 정도 크기인 파피루스 문서 파편의 모습.“ 나의 아내”“그녀는 내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등의 맥락 없는 단어와 조각난 문장들이 나열돼 있다. /뉴욕타임스, AP뉴시스.
◇유다·도마·막달라 마리아…이어지는 문서들

예수의 삶과 관련한 '이설(異說)'의 역사는 오래됐다. 도마가 예수의 쌍둥이라고 확언한 '도마행전', 가룟 유다가 예수의 진정한 제자였다는 '유다복음', 깨달음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는 '도마복음' 등이 그렇다. 이런 주장은 이스라엘이집트 등 중동 지역에서 새 문서가 발견될 때마다 불거졌다. 그 바탕에는 예수 사후 이집트 등을 근거로 번졌던 영지주의가 깔려 있다. 영지주의는 유대교, 기독교, 점성술, 그리스·이집트 철학·사상 등이 혼합된 일종의 이단 사상. 교리적으로 정통 기독교와는 큰 차이를 보여 3세기경 이후로는 사라졌다. 하지만 당시의 파피루스 문서 등이 간헐적으로 발견되면서 '음모론'적 내용이 대중의 호기심과 맞물리며 계속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이다. 세계적 베스트셀러였던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 역시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으며,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해 자손을 남겼다는 영지주의적 가설 위에 설계됐다. 하지만 이들 문서는 하나같이 잠시 대중의 눈길을 끌었을 뿐, 학계의 정설로 받아들여진 경우는 없다.

◇"문헌적·역사적 맥락 없는 파편"

미국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 박사 출신인 김범식(49) 목사(서울여대 대학교회 담임)는 "예수의 열두 제자를 중심으로 한 사도교회에서 인정받지 못한 영지주의자들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와 결혼하는 등의 특별한 관계였으며 특별한 지식을 전수받았다고 설정하고, 자신들 신앙의 교조로 삼아 종교적 정통성을 확보하려 시도했었다"고 말했다. 클레어몬트대는 미국 내에서 영지주의 문서 연구를 주도해왔다. 대부분의 기독교 영지주의 문서는 3~4세기 정도에 쓰였다는 것이 학계의 통설. 김 목사는 "마태·마가·누가·요한복음 등 4대 복음서는 대개 1세기 중반에서 후반 사이에 쓰인 것들"이라며 "기록의 연대로 봐도 복음서가 훨씬 신빙성이 있다"고 했다.

천주교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번역담당 총무 신교선 신부는 "성서 외의 수많은 종교 문헌이 있지만, 예수가 혼인했다는 얘기는 등장하지 않는다"며 "4세기 콥트어 문서는 지리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신약시대와 거리가 너무 멀어 신빙성을 얻기 어렵고, 문서 파편 하나로는 역사적 사료로서의 가치가 거의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