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언제나 弱者 보듬은 '아르헨의 김수환'

청 송 2013. 3. 15. 08:37

언제나 弱者 보듬은 '아르헨의 김수환'

입력 : 2013.03.15 03:02

제266대 교황은 프란치스코… 1282년 만에 非유럽 출신

[아르헨 출신 마리아 수녀, 내가 본 주교 시절 교황]
"새 교황, 허름한 아파트에 버스 출퇴근… 아르헨티나 대통령에 늘 쓴소리"

마리아 바스케스 수녀

바티칸에서 교황을 뽑는 콘클라베 개막 이틀째인 13일(현지 시각) 투표 4번 만에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76) 추기경이 제266대 교황으로 선출됐다. 교황명을 '프란치스코'로 정한 새 교황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장으로 일해왔다. 잘 알려지지 않은 새 교황의 인품과 활동을 현재 한국에 있는 유일한 아르헨티나인 가톨릭 수도자인 마리아 바스케스 수녀가 들려준다.

1996년 6월 부에노스아이레스 대성당 앞에서 열린 야외 공개 미사에 구름처럼 많은 사람이 몰렸다. '그리스도의 성체성혈대축일' 미사였다. 교황님(당시 베르고글리오 주교)은 이런 대축일 미사를 늘 대성당 앞 광장에서 집전했다. 그를 보려고 몰려드는 사람들을 성당 안에 다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미사가 끝나면 그분은 강단 아래로 내려와 사람들 손을 일일이 잡아주며 인사를 나눴다. 남미 아줌마 특유의 수다도 웃으며 다 들어줬고, 먼저 손을 뿌리치는 일도 없었다. 말하기보다 듣는 사람이었다. 말을 할 때면 느릿느릿했고, 막 서원을 한 막내 수녀인 내게도 '무슨 일을 하느냐' '잘 지내고 있느냐' '힘든 일 있으면 꼭 연락하라'고 말씀하셨다. 사제와 주교는 신자들 위가 아니라 낮은 자리에 신자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고 여기는 분이었다. 교회의 큰 행사 때마다 뵙는 것 외에, TV나 신문에서도 그분 얼굴을 자주 뵈었다.

1990년대 말, 아르헨티나는 외환 위기와 경제난으로 어려웠다. 특히 농업과 목축업을 하는 시골 사람들이 큰 피해를 보았다. 그분은 가난한 이들의 문제에 관한 한 누구와 맞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농촌 피해 대책을 소홀히 하는 대통령과 공개적으로 말싸움을 했다. 이 사람들이 열심히 살려고 얼마나 애쓰는지 아느냐고. 왜 도와주지 않느냐고. 불의(不義)가 있으면 그냥 넘기지 않았다. 그래서 맨날 싸웠다.

제266대 교황으로 선출된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 아르헨티나 추기경이 14일(현지 시각) 로마 산타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을 떠나면서 군중에게 인사하고 있다. 그의 교황명‘프란치스코’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살았던 성자(聖者)의 이름을 땄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가톨릭 사상 첫 미주(美洲) 대륙 출신이자 첫 예수회 출신 교황이다. /로이터 뉴시스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빌랴(villa)’라는 빈민가가 곳곳에 있다. 레티로, 산미겔, 메를로…. 마약 중독자, 범법자, 돈 없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주교님은 그런 곳을 자주 찾아가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관청의 높은 사람들, 부자들을 만나 사람들의 고통을 얘기하고, 해결해주려 애썼다. 신부님들도 “주교님은 젊을 때부터 가난한 이들 편에 섰던 분”이라고 자랑스러워했다. 많은 국민이 그분을 존경했다. 한국의 김수환 추기경 같은 분이라고 할 수 있다.

가난한 이의 편이었을 뿐 아니라, 스스로 가난을 실천하기 위해 애썼다. 주교가 된 뒤 기사 딸린 관용차가 나왔지만 거절했다. 시 외곽의 허름한 아파트에 살며, 스스로 음식을 만들어 먹고, 버스와 지하철로 출퇴근하는 모습을 보며 다들 그분의 뜻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분은 자기 몸으로 직접 사제들에게 청빈(淸貧)의 모범을 보였다.

타인에겐 한없이 너그러웠으나, 신앙의 원칙에 관해선 후퇴를 몰랐다. 가톨릭 국가 아르헨티나의 동성 결혼 합법화에 가장 강력히 반대한 사람 중 한 명도 그분이었다.

☞ 마리아 수녀는…

1995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수녀로 서원한 뒤 2년간 주교 시절의 프란치스코 교황을 곁에서 지켜봤다. 수녀는 그 뒤 한국·페루 등에서 이주 근로자를 돌보는 봉사를 주로 해 왔다. 지금 한국에 있는 유일한 아르헨티나인 가톨릭 수도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