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자료

[스크랩] 명량해전 //중국과 일본이 본 이순신..

청 송 2016. 1. 27. 19:30


세계속의 영웅, 이순신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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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해전  

1

https://www.youtube.com/watch?v=vtlVfedWS6w


2

https://www.youtube.com/watch?v=Cu7jR7Yh3v0


3

https://www.youtube.com/watch?v=7gXZubhsRpk


4

https://www.youtube.com/watch?v=8pJi7c4tFo0


5

https://www.youtube.com/watch?v=bVqpvBzqYuE


6

https://www.youtube.com/watch?v=_NSaIPygadI


7

https://www.youtube.com/watch?v=jVkycfbaT7g


8

https://www.youtube.com/watch?v=zYYi8d-11m0


9

https://www.youtube.com/watch?v=aAou_eSzidg


10

https://www.youtube.com/watch?v=hg1-Gtx913Y


11

https://www.youtube.com/watch?v=29uetwMdsMw


12

https://www.youtube.com/watch?v=1wSqXvQhQc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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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 해전(鳴梁海戰)은 

정유재란 중인 1597년 음력 9월 16일

이순신이 거느린 13척의 수군이 일본 수군 130여 척을 명량에서 격퇴한 해전이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必生則死 必死則生 필생즉사 필사즉생
─ 이순신, 『정유일기』 9월 15일


지금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있사옵니다.
今臣戰船 尙有十二 금신전선 상유십이


전선은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이 아직 죽지 않았으므로
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戰船雖寡 微臣不死則 不敢侮我矣 전선수과 미신불사즉 불감모아의
─ 『이충무공전서』, 이분, 「행록」




18일 정미, 맑다.
새벽에 이덕필과 변홍달이 와서 전하길 "16일 새벽에 수군이 대패했습니다. 통제사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충청수사 최호와 뭇 장수들이 다수 살해당했습니다."라고 하였다. 통곡을 이기지 못했다. 잠시

있으니 도원수가 와서 이르길 "사태가 이에 다다랐으니, 어찌할 수가 없소이다."라 하였는데, 대화가

사시(巳時)에 이르러도 대책을 정할 수가 없었다. 내가 아뢰어 내가 해안으로 가서 보고 듣고서 정하겠다고

 하니 도원수가 기뻐하였다. 내가 송대립, 유황, 윤선각, 방응원, 현응진, 임영립, 이원룡, 이희남, 홍우공과

함께 길을 떠나 삼가현에 다다르니, 수령이 새로 부임하여 나아와 기다렸다. 한치겸도 왔다.
─ 이순신, 『정유일기』 7월 18일.


7월 18일
칠천량 전투의 소식을 듣다. 도원수 권율과 대책을 의논하고 초계를 출발하여 삼가에 도착.

7월 19일
단성에서 숙박.

7월 20일
진주 굴동에서 이희만의 집에 숙박.

7월 21일
곤양을 지나 노량에 도착, 거제현령 안위 등 패잔병을 수습. 거제현 소속 배 위에서 숙박.

7월 22일
경상수사 배설이 합류. 곤양에서 숙박.

7월 23일
진주 굴동으로 돌아와 이희만의 집에 숙박. 배흥립이 합류.

7월 24일
이홍훈의 집에 숙박. 배경남이 합류.

7월 27일
손경례의 집에 숙박.


이후로도 한동안 진주 굴동에 머무르고 있던 이순신은 8월 3일 아침에 비로소 자신을 전라좌수사 겸 삼도

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는 선조의 교서를 받든다. 조정에서 22일에야 칠천량 패전의 소식을 접하고 내린

교서가 비로소 도착한 것이었다. 선조실록에는 단지 이순신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겸 경상·전라·충청

삼도통제사로, 권준을 충청도 수군절도사로 삼았다는 짤막한 기록만이 남아 있을 뿐이지만, 이충무공전서에

 실려 있는 삼도통제사 복직교서의 내용은 이러하다.


왕은 이른다. 오호라! 국가가 의지하여 방패로 삼는 것은 오직 수군이거늘, 하늘이 재앙을 거두지 않으사

흉악한 칼날이 다시 번뜩여 마침내 삼도의 대군이 한 번 싸움에서 다하고 말았도다. 이후로 바다 가까운

성읍은 누가 지키겠는가? 이미 한산을 잃었으니 적이 무엇을 꺼리겠는가? …… 지난번에 경의 직책을 빼앗고

 그대로 하여금 죄를 짊어지도록 한 것은 역시 과인의 모책이 미덥지 못함에서 나온 것이었으니, 무슨 말을

 하리오. 무슨 말을 하리오(尙何言哉 尙何言哉 상하언재 상하언재)...... 그대는 충의로운 마음을 굳건히 하여

 우리의 나라 건지길 바라는 소망에 부합하라. 고로 이 교지를 내리니 그대는 헤아려 알라.
─ 『이충무공전서』, 「상중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를 제수하는 교서(起復授三道統制使敎書)」



조선처럼 강력한 중앙집권이 실현된 국가에서 왕이 신하한테 이런 표현을 쓰는 것 자체가 파격적이다.

"내가 멍청해서 네 관직을 빼앗고 벌을 줬다. 할 말이 없다."고 인정한 것이다. 그만큼 나라의 존망이 목전에

 달린 급박한 상황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수군 없는' 수군절도사 겸 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8월 3일
새벽에 복직교서가 도착. 권관 등 10여 명을 거느리고 진주 굴동에서 이홍훈의 집을 출발하여 종일 움직인

 끝에 구례에 도착.

8월 4일
곡성에서 숙박.

8월 5일
옥과에 도착.

8월 6일
옥과에서 숙박. 송대립 등이 일본군을 정탐.

8월 7일
순천으로 가던 중 패잔병으로부터 말 3필과 약간의 활과 화살을 탈취(!). 곡성 강정에서 숙박.

8월 8일
순천에 들어가 달아나려는 수령들을 잡고 방치된 군기를 처리. 순천에서 숙박.

8월 9일
낙안을 거쳐 보성 조양창에 도착, 이 과정에서 순천부사 우치적이 합류. 김안도의 집에 숙박.

8월 11일
임란 초부터 보좌해왔던 송희립이 최대성과 함께 합류.

8월 13일
패전 직후 가족을 데리고 달아났던 경상우후 이몽구가 합류, 본영의 군기를 가지고 오지 않았으므로 곤장을

 침.

8월 14일
장계 일곱 통을 송부. 보성에 도착, 열선루에서 숙박.

8월 15일
교지가 도착. 보성의 군기를 처리.

8월 16일
보성군수와 군관 등을 보내 피난했던 관리들을 데려옴, 궁장인 지이와 태귀상 등이 들어왔고 김희방과

김붕만 등도 합류.

8월 18일
회령포에서 배설이 끌고 도망쳤던 전선 10척을 입수하여 그나마 수군의 구색을 갖춤.

그러나 여기에서 그나마 구색을 갖추었다는 표현은 과장이 아니다. 선조실록에 이때의 군함 수가 나오는데...


근래 또 배신(陪臣) 겸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보낸 장계에 의하면, "한산도가 무너진 이후 전선과 무기가

흩어지고 사라져 거의 다하였습니다. 신은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김억추 등과 더불어 전선 13척, 초탐선

32척을 수습하여 해남현의 바닷길에서 요충지를 지키고 있었는데……"
─ 『선조실록』 권94, 30년 11월 정유(10일) 5번째 기사


현재로 따지면 모두 합쳐도 전투함 13척에 초계함 32척이 전부였고, 이는 명량해전 당시에 동원했던 전선만

 최소 133척에 이르던 일본군과 비교하면 대단히 안습한 숫자였다. 이순신이 거느린 수군이나 조정 내에서는

 당장이라도 수백 척의 배가 들이닥칠 거라는 공포가 만연해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당시의 조선 수군은

싸움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조정 일각에서는 '배도 없는데 수군을 없애고 육군으로 합치자'라는 의견이 나왔다. 선조 또한 이순신을

육전으로 돌리려고 했다. 이러한 언급은 선조실록과 난중일기가 아닌 행록에만 등장하지만, 이토록 전력비가

 기울어져 있으니 전략을 수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물론 이건 사실상 국가를 버리는 엄청나게 멍청한

 짓이었다. 조선은 육상 도로망이 발달하지 않아서 강을 길로 삼아서 물자와 인원을 유통시켰고, 실제로도

행주 대첩에서 적절한 순간에 한강을 통한 보급이 들어와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당연히 육상전은 일본군

이 바라는 일이었다. 만약에 이순신이 육전에 임했다면 일본 수군을 이끌던 도도 다카도라, 가토 요시아키,

 구루시마 미치후사, 구키 요시다가,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의 적장들이 배를 타고 한양으로 진격하여, 전쟁의

 판도를 뒤엎을 수도 있었다.

심지어, 수군 폐지령은 13척의 배를 보존하고 육군의 전력이라도 향상시키고려는 의도조차 아니었다. 병력이

란 적절한 지휘체제가 있어야 의미를 가지는 법인데, 선조의 대변인 노릇을 했던 윤두수는 칠천량 해전 직후

에 있던 어전회의에서, "통제사를 임명하지 말고 각지의 수사들이 고을 단위로 방어하게 하자!"는 정신나간

주장을 했다. 이것은 까놓고 말해서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수임하기 싫으니, 단일한 지휘관을

 임관시키기를 포기하고 병력을 분산시켜서 왜군에게 각개격파 당하자는 개소리나 다름없었다.[6]


임진년부터 5·6년 간 적이 감히 호서호남으로 직공하지 못한 것은 수군이 그 길을 누르고 있어서입니다.

 지금 신에게 아직 열두 척 전선이 있사오니(尙有十二 상유십이) 죽을 힘을 내어 막아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지금 만약 수군을 모두 폐한다면 이는 적들이 다행으로 여기는 바로서, 말미암아 호서를 거쳐 한강

에 다다를 것이니 소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전선이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이 죽지 않았으므로

(微臣不死 미신불사)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 『이충무공전서』, 이분, 「행록」


그러나 이순신은 위와 같이 아직 열두 척의 캐리어 전선이 있다는 패기가 흘러넘치는 명언으로 장계를

올리며 동요하는 여론을 잠재웠다. 데꿀멍했을 여론들이 상상된다 이순신은 힘들더라도 제해권을 되찾아야

만 반격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이순신의 이런 뚝심은 정유재란의 흐름을 바꾸게

 되었다.



울돌목으로[편집]사흘 동안 회령포에 머무르면서 가까스로 수군과 전선을 수습한 이순신은 8월 20일에

그보다 조금 더 큰 이진포로 진을 옮겼다. 하지만 여전히 수군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칠천량에서 겪은

패배로 장졸[7]들의 사기는 바닥을 치고, 일본군의 대함대가 임박했다는 공포가 군사들을 짓누르고 있었다.

 이순신의 묘사에 따르면, 경상우수사 배설이 교서에 절하길 거부하는 등 공공연히 조정과 전쟁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고 있었으며[8], 전라우수사 김억추는 사람됨이 미덥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이순신도 21일

부터 토사곽란으로 사흘 내내 몸져누워 있었다. (이순신은 만성 위염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다음

날에는 어란진으로 이동했고, 이곳에서 적이 왔다는 헛소문을 퍼트린 이들을 처형해서 군율이 건재함을 보여

주었다.(..)

27일 을유, 맑다.
배설이 와서 만났는데, 많이 두려워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수사는 어찌 피하려고만 하시오!"라고 하였다.


─ 이순신, 『정유일기』 8월 27일.

이처럼 터질 듯한 긴장감이 가득한 가운데 8월 28일, 드디어 일본군이 나타났다.


28일 병술, 맑다.
적선 8척이 생각지도 못하게 들어왔다. 뭇 배들이 두려워 겁을 먹고, 경상수사는 피하여 물러나고자 하였다.

나는 동요하지 않고 호각을 불고 깃발을 휘두르며 몰아내도록 명하였다. 적선이 퇴각하자 추격하여 갈두

(葛頭)에 이르렀다가 돌아왔다. 저녁에 진을 장도(獐島)로 옮겼다.
─ 이순신, 『정유일기』 8월 28일.


28일에 어란진에 나타난 일본군은 고작 8척의 수색대였지만 이미 겁을 잔뜩 집어먹은 조선 수군은 무기력한

 모습만을 보여준다. 수색대를 물리친후 [9] 이순신은 29일에 다시 벽파진으로 이동하여 진을 치고 결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9월 2일에는 마침내 고위 지휘관인 경상우수사 배설이 도주이름부터 똥쟁이해버리는 사태

까지 벌어졌다. 이순신은 이전부터 그를 탐탁치 않게 보았으므로 단지 '배설이 달아났다'고만 담담하게

적었다.[10] 이렇게 이순신이 싸울 준비를 하는 동안, 일본 수군은 전라도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서해를 거쳐

 한양을 공격하자는 구상을 하게 된다. 그들은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을 궤멸시킨 자신감으로, 이번 기회에

 이순신을 무찌르고 전쟁의 승기를 잡자는 생각이었다. 사실 객관적으로 봐도 12척으로 300여 척 이상을

갖춘 함대를 막아낸다는 것은, 항우가 살아 돌아와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항우는 해전을 안했으니까 그렇지 육전이었으면... 당사자인 조선 수군, 조정, 일본 수군조차도 같은 생각

이었다.

일본 수군은 9월이 되자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9월 7일에 어란진으로 들어와서 벽파진의 이순신과 대치

하는 구도를 만들었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일본군 수뇌부는 이미 이순신에게 배가 13척 밖에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고, 이를 조롱하듯 처음 13척의 배만을 보내서 벽파진에 주둔한 조선 수군에게 시비를 걸기도

했다. (...) 칠천량 해전 이전까지 조선 수군의 판옥선이 한 번도 격침된 적이 없지만 수전에서 이토록 일본군

이 유리한 상황에서 전투를 시작한 것이 거의 최초임을 감안하면 일본군은 한 척의 대장선을 상대로는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라 낙관한 것으로 보인다.[11] 참고로 배설이 도주한 이후의 난중일기 기록을 보면...


9월 3일 신묘, 비오다.

9월 4일 임진, 북풍이 세게 불다.

9월 5일 계사, 북풍이 세게 불다.

9월 6일 갑오, 바람은 잠시 잠잠하나 파도가 가라앉지 않다.

9월 7일 을미, 바람이 비로소 그쳤다.
탐망군관 임준형이 적선 55척 가운데 13척이 이미 어란진에 들어왔다고 보고. 미리 경계하고 있다가

신시(申時)에 적선 13척이 접근하자 구축, 이후로도 야습을 경계하다가 이경(二更)에 적선이 야습하자

배들이 겁을 집어먹고 있는 것 같아 다시 엄명을 내리고 대장선이 직접 선두에 나서서 적선을 구축.

9월 8일 병신, 맑다.
적선이 오지 않다. 장수들과 함께 계책을 논의.

9월 9일 정유, 맑다.
적선 두 척이 아군을 정탐. 영등포만호 조계종이 추격하나 놓침.

9월 10일 무술, 맑다.
적선들이 멀리 달아남.

9월 11일 기해, 흐리고 비오다.

9월 12일 경자, 비가 내리다.

9월 13일 신축, 맑다. 북풍이 세게 불다.

맑은 날엔 계속해서 일본 수군이 시비를 걸고 있었다. 이어지는 14일에는 임준영의 보고가 들어왔는데,

일본군 200여 척 가운데 55척이 어란진에 입항했고, 일본군에게서 탈출한 포로가 전한 바에 따르면 일본군

은 단숨에 이순신 함대를 격멸시킨 다음 서해를 따라 한강을 타고 올라가려는 대담한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 만약 이게 실현되었다면 정유재란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다음날인 9월 15일, 전투가 임박했음을 안 이순신은 전투 준비를 서둘렀다. 오익창의 사호집에 의하면 이

순신은 사대부들의 솜이불 백여 채를 걷어다가 물에 담가 적신 뒤 12척 배에 걸었는데, 왜군의 조총 탄환이

 이것을 뚫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장기전을 예상해서인지 동아를 배에 가득 싣고 군사들이 목마를 때마다

먹였더니 갈증이 해소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렇게 조선 수군은 오랫동안 상대의 화력을 견디며 싸울

준비를 했고, 적은 수의 함선으로 울돌목을 등지고 싸울 수는 없다고 판단한 이순신은 진영을 울돌목 너머의

 우수영으로 옮긴 뒤 장수들을 불러 모아 다음과 같이 다짐했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고 했으며, 또한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그대들 뭇 장수들은 살려는 마음을 가지지 말라.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긴다면 즉각 군법으로

다스리리라!
─ 이순신, 『정유일기』 9월 15일[12]


이날 밤에는 이순신의 꿈에 신인이 나타나 이기는 방법과 지는 길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KBS에서

방송했던 한국사전에서는 밤에 이상한 징조도 많았다고 언급했다. 주인공 보정 정말로 판타지 같은 일이

일어났다기보다는, 이순신도 꿈속에서까지 승리를 바랄 정도로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상황으로 볼 수

있겠다.



전투의 시작[편집]운명의 9월 16일 아침, 날씨는 맑았다. 이윽고 초병으로부터 수없이 많은 왜선들이 접근해

 온다는 보고가 들어오고, 이에 이순신은 기함까지 13척의 배를 이끌고 요격에 나섰다. 이것이 바로 명량

해전의 시작이었다. 이순신이 탄 배에서는 일기기록에서 "전투원인 병사들이 왜군 규모를 봐서 그것에 겁을

 먹어서 얼굴빛이 많이 질렸다고 하였고 나는 그들에게 조심스레 부드럽게 타일렀다."고 하였다.


9월 16일, 맑다.
이른 아침에 별망(別望)이 나아와 보고하길, "수없이 많은 적선들이 곧장 우리 배를 향해 옵니다."라 하였다.

바로 뭇 전선에 명하여 닻을 들고 바다로 나아가니, 적선 130여 척이 아군의 뭇 전선을 에워쌌다. 여러 장수

들은 저마다 중과부적이라 판단해 돌아서 피할 궁리만 했고, 우수사 김억추는 물러나 아득히 멀리 있었다.


내가 노질을 재촉해 앞으로 돌격하며 지자포 현자포와 각종 총통들을 어지러이 쏘아대니 마치 바람과 번개

 같았고, 군관들이 배 위에 서서 화살을 비처럼 어지러이 쏘아대니 적도들이 감히 대적하지 못하여 다가왔다

가 물러나고는 했다. 그러나 몇 겹으로 포위되어 있어서 전세가 어찌 될 것인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 이순신, 『정유일기』 9월 16일


구체적인 언급은 없지만, 다른 인물들의 기록이나 여러 가지 정황을 보면 울돌목에서 전투가 일어났을

개연성이 크다. 지형이 좁고 조류가 거친 울돌목은 전장으로서는 최악의 환경이지만, 절대적으로 열세인

조선군의 입장에서 그나마 유리할 수 있었던 곳이었다. 적선이 아군의 전선들을 몇 겹으로 에워쌌다는 난중

일기의 표현으로 미루어 전라우수영 앞바다에서 일어났다는 주장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배들이 겁을

먹고 멀찌감치 물러나 있었음이 확인되므로, 이는 전 함대가 아니라 이순신의 대장선과 주변에 있었던

초탐선들을 묶어서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3.2. 군법에 죽고 싶으냐[편집]

이순신이 탄 대장선이 가장 먼저 앞으로 나아가 적선을 막아서고 분전했으나, 왜군의 숫자와 거센 조류에

압도당한 부하 장수들은 본능적으로 여차하면 도망갈 생각부터 하고 있었다. 난중일기에는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특히 명량 해협이 한눈에 보이는 망금산에서 명량 해전을 지켜보는 백성들이 통곡을

 하였고 이순신은 그 광경을 보고 부하 장수들에게 분노하였다.


뭇 장선(將船)들을 돌아보니, 물러나 먼 바다에서 관망하며 나아가지 않고 배를 돌리려 하고 있었다.
─ 이순신, 『정유일기』 9월 16일


전라우수사 김억추는 수 마장 뒤로 물러나서는 아예 전투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었으며,[13] 거제현령

안위, 녹도만호 송여종, 조방장 배흥립, 해남현감 류형, 가리포첨사 이응표 등등 절대로 전투를 주저하지

않았어야할 역전의 용사들까지도 후방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맞붙어 봐야 전멸이 뻔하다는 판단 때문

이었다. 심지어 조류마저도 왜군에게 유리하게 흐르고 있었는데, 이민서가 쓴 명량대첩비문에서는 '때마침

밀물이라 파도가 거세고 적들이 상류로부터 밀물을 타고 덮쳐와서 그 기세가 산이 찍어누르는 듯했다'고

서술하고 있는데, 이순신이 묘사한 역류는 과학적으로도 증명되었다. 링크 그러니까 이순신은 홀로 울돌목

 미친 물살에 정면으로 맞서면서, 압도적인 숫자의 적들을 막아서고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은 바로 이러한 위기의 순간에 다른 장수들이 뒤에서 꽁무니를 빼는 것을 목격했던 것이다. 이순신은

 호각을 불며 초요기를 걸어서 중군장과 여러 전선들을 소집했다. 목을 먼저 베어걸고자 하였으나 이 전투

 자체가 이순신이 아니라면 누가 봐도 개죽음이 분명했기에 무조건 비난할 수가 없었던 데다[14] 도망간

아군배를 잡으러 갈 시 적선이 더 전진할 것을 우려했다.[15] 이에 장수들이 슬금슬금 다가왔는데, 이순신은

 배 위에서 가장 먼저 도착한 거제현령 안위의 배를 향해 외쳤다. 안위야 네 안위만 생각할테냐!


안위야, 싸우다 죽고 싶으냐! (아니면)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달아난다고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 이순신, 『정유일기』 9월 16일


이에 안위가 황급히 적진으로 돌입했고, 또한 이순신은 뒤이어 도착한 중군장 김응함에게도 다음과 같이

외쳤다. 김응함은 중군장으로서 대장선의 호위와 지휘 명령을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해야 하였으나, 그마저도

 방기하고 후방에 물러나 있었으며 심지어 특별한 함대편제상 직책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 안위보다도 늦게

 대장선과 합류했으므로, 그에 대한 이순신의 분노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16] 응함아 싸움에 응하지 않고

 뭐하는 짓이냐!


너는 중군이 되어서 멀리 피해만 있고 대장을 구하지 않았으니, 죄를 어찌 면하겠느냐! 당장이라도 처형

하고 싶지만 적의 기세가 또한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하겠다!
─ 이순신, 『정유일기』 9월 16일


안위와 김응함이 나서자, 차츰 잦아들어가는 밀물 위에서 명량해전은 난전으로 바뀌었다. 왜선 세 척이 안위

의 배에 달라붙었고, 급기야 안위의 배 위에서 접전이 벌어져 안위의 함선에서 다수의 사상자가 나고 그 자신

도 위험하게 되자 이순신은 대장선을 이끌고 나아가 왜선 세 척을 내리 부수면서 안위를 구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후 마침내 녹도만호 송여종과 평산포대장 정응두를 필두로 다른 전선들도 일제히 합세하면서 일본군

 함대를 공격하자 비로소 지금까지 이순신 혼자서 이끌어오던 전세가 뒤집히기 시작한다. 이것이 또한 물살

의 흐름이 조선군에 유리하도록 바뀌는 12시 즈음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위의 내용을 근거로 한 포스팅.


기적 같은 승리[편집]이러한 난전에서, 구루지마 미치후사의 대장선이 격파되고 구루지마가 사망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안골포에서 투항했던 항왜 준사가 과거 자신의 상관이었던 마다시(馬多時)[17]

시체를 알아보았다. 이순신은 부하 김돌손을 시켜서 마다시의 시체를 건져냈고, 준사가 마다시의 얼굴을

보고 정체를 확인하자 이순신은 그 시체를 토막내어 걸어서 일본군의 사기를 꺾어버렸다. 뿐만 아니라

수군을 총지휘하던 도도 다카토라는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직접 조선 수군의

 패배를 확인하라고 파견한 감독관 모리 다카마사는 물에 빠지는 촌극을 빚었다.[18]

오후 1시 경, 완전히 조수가 바뀌어 물의 흐름이 역전되면서 조선 수군은 이를 타고 공세로 전환했다. 판옥선

이 강한 물살을 타며 포격해 가자 전열이 무너진 일본 수군의 전함들은 순식간에 격파되기 시작했다. 일본

수군은 이 과정에서 11척이 추가로 격침되었고, 결국 5시 경 일본 수군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퇴각함에

따라 전투는 종료되었다. 조선 수군 또한 전장을 수습한 뒤 당사도로 후퇴하였다.


적선 30척을 깨부수자 적선들이 물러나 도망치니, 다시는 아군에게 접근하지 못했다. 이는 실로 천행이었다.

(此實天幸)
─ 이순신, 『정유일기』 9월 16일


전과[편집]

내 배에서는 순천감목관 김탁과 본영의 종 계생이 총알에 맞아 죽었다. 박영남, 봉학과 강진현감 이극신도

총알에 맞았으나 중상을 입지는 않았다.
─ 이순신, 『정유일기』 9월 18일


놀랍게도 난중일기에 조선 수군의 피해는 대장선에서 사망자 2명, 부상자 3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이것이 전체 피해자인지, 아니면 대장선의 피해자만을 기록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대장선만의 피해로

 보더라도 대단한 전과인데, 전투 중반까지 대장선 혼자서 밀려드는 적선 수십척을 상대로 두세 시간을

싸웠는데도 이런 결과라면 그냥 전투는 대장선 혼자 했고 왜군들은 대장선한테 일방적으로 학살당한 거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이외에도 실제로 접전이 벌어진 안위의 배에서는 사상자가 다수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난중일기에는 거제전선의 격군 5~6명이 물에 뛰어들었다고 하는데, 울돌목의 거센 물살로 보아 사실상

사망.(...)

이순신은 난중일기에서 이날 적선 30척을 부수었다고 하였고, 조정에 올린 장계에서는 전투 전반부에 20척,

 후반부에 11척을 각각 격침시켰다고 썼다. 일반적으로는 일본 수군의 피해는 이렇게 단순히 31척으로

알려져 있다. 실록에도 '적선 31척을 격침하고 수급 8개를 취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이순신이 눈앞에서 확인한 전과만 적은 것이고, 다른 사료들을 종합해보면 실제 전과는 더 컸을

가능성이 크다. 조경남의 난중잡록에서는 '패배하여 도망치는 적병의 뒤를 쫒아 목을 베어 죽인 것이

수백여 급이며, 무사히 탈출한 적선이 겨우 10여척 뿐이었고, 아군의 배는 모두 무사하였다'고 적고 있다.

연려실기술에서도 '적의 배는 겨우 10여척이 도망쳤을 뿐이고 우리 배는 모두 무탈하였다'라고 기록했다.

10여척만이 도망친 것은 다소 과장의 여지가 있을 수는 있으나 그만큼 일본측의 피해가 컸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후략



출처

https://namu.wiki/w/%EB%AA%85%EB%9F%89%20%ED%95%B4%EC%A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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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일본이 본 이순신..


http://tip.daum.net/openknow/39259845





출처 : 엔카 컴나라
글쓴이 : 迎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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