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광복 72주년을 맞이한
구 서대문
형무소
안산 자락길을 통해서 안산정상에 올랐다가
하산길에 지금은 독립공원인 (구) 서대문형무소 안팎을 돌아보면서
일제 36년동안 우국지사들의 고난의 발자취를 새겨보며 분통터지는
격분도 느끼고, 생존하셨다면 8순 9순의 우리들의 어머니가 되셨을
273명의 여성지사들을 보면서 큰 감동을 느끼고 자제력을 잃은 듯한
눈물을 훔치기도 했답니다. 금년이 광복 70년인 의미있는 해라고하니
안산행 날 몇 컷 담아온 사진도 참고로 보시고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아이들과 함께 찾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형무소내 교수형장↓
시신을 수습해서 화장장으로 싣고 나가는 지하↑
수감자 고무신(남자)
수감자 버선과 고무신(여자)
족쇄
수갑
용수
(수감자 이송시 일반인에게 독립운동가의 얼굴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얼굴에 씌웠던 도구)
태극기 목각판
(3.1독립만세 운동 당시 태극기를 대량으로 만들 때 사용)
고귀한 생명을 아끼지 않고, 오직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한 목숨 받친 애국지사, 독립운동가들,
약5천명의 수감자들에 대한 수감증.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다들 아시겠죠?.
잠시 느껴 봅시다.
"고문당하는 거,
그게 무서우면 독립운동 못하지..."
물고문
(강제로 수조에 머리를 집어넣거나, 코나 입에
물을 마구 들이 부어 호흡을 곤란하게 하여
고통을 주었던 고문방법. 불구가 되거나
사망도 하였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손톱찌르기 고문
(가늘고 날카로운 꼬챙이를 손톱 밑으로 찔러
고통을 주었던 고문방법 이라고 합니다)
상자 고문
(상자 안쪽에 날카로운 못을 박아 놓고,
사람을 상자 안에 집어 넣어 마구 흔들어
못에 찔리게 하여 고통을 주었던 고문 도구)
지하 독방 고문
(취조 후 옥사로 이동하기 전 감금했던 곳,
빛이 전혀 들지 않은 지하방에
가둬 놓고, 곳곳에서 들려 오는
고통의 비명소리와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고문의 공포를 느끼게 하였던 곳)
벽관 고문
(옴짝달싹할 수도 없이 좁은 공간에 사람을 감금하여 앉을
수도 움직일 수도 없는 고통을 주었던 고문도구)
****************************************************
[기록으로 보는 옥중생활]
*.김광섭 "나의 옥창 일기"
기상 나팔 소리에 일어나 단벌 이불을 개고
수건에 물을 짜서 몸을 훔친다..(중략)....
홀딱 벗고 문 앞에 선다. 무명수건 하나를 들고 문이
열리자 고개를 끄덕 하고는 복도를 달려 층계를 내려와
큰문에 나서면 겨울 물에 풍덩 뛰어드는 듯 찬바람을
훅 느끼며 창창한 대한천에 뛰어든다. 정신없이 달리다가
문 가운데 놓인 허들을 훌쩍 뛰면서 입을 아~벌려야 한다.
뛰는 것은 항문에 감춘것이 없다는 표시요. 아~하는
것은 입에 문 것도 없다는 증거다.
*.계몽소설 상록수 작가 심훈
"옥중에서 어머니께 올리는 글월"
날이 몹시도 더워서 풀 한 포기 없는
감옥 마당에 뙤약볕이 내리쪼이고,
주황빛의 벽돌담은 화로 속처럼 달고
방 속에는 통통이 끓습니다.
밤이면 가뜩이나 다리도 뻗어 보지 못하는데,
빈대.벼룩이 다투어 가며 진물을 살살 뜯습니다.
그래서 한 달 동안이나 쪼그리고 앉은 채 날밤을 새웠습니다.
그렇건만 대단히 이상한 일이지 않겠습니까?.
생지옥속에 있으면서 하나도 괴러워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의 눈초리에나 뉘우침과 슬픈 빛이 보이지 않고,
도리어 그 눈들은 샛별과 같이 빛나고 있습니다.
감방 내부
(위에 있는 사람은 일본인 간수의 조형물)
감방 출입문
(부쉬지 못하게 대략 10Cm 가량 두께로 튼튼하게 제작)
옥사의 통풍구조
(옥사 외벽에 일정한 간격의 구멍이 둟어져 있는데 이는
옥사 내부 감방이 마루로 되어 있기 때문에
마루가 썩고 습기가 차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뚫어 놓은 일종의 환기구)
독방의 용변 배출구
(독방에 감금된 수감자는 외부와 철저히 격리시켰기
때문에 용변을 치울 때 조차 사람과 접촉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마룻널 끝 쪽에 구멍을 내어 그 구멍에
용변을 보게하여 밖으로 배출하게 함)
격벽장
(수감자 상호간에 대화를 방지하고
감시를 용이하게 하기위하여
여러 개의 칸막이벽[격벽]을 만들어,
각 칸에 수감자들을 분리 수용하여
운동을 시켰던 운동시설)
추모비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시다
순국하신 분들을 모신 자리)
*.여기서 잠시*
진정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수 없는 고문과
고통 그리고 목숨까지 받쳐가며
나라를 구하신 분들에 대한 추모비가 너무나
허술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너무 형식적이다 싶어 차라리 설치하지 않은 것
보다 못하다는 개인적인 생각이 들었습니다.
통곡의 미루나무
(이 미루나무는 1923년 사형장 건립 당시 식재된
나무로서,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애국지사들이
마지막으로 이 나무를 붙잡고 조국의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생을 마감해야 하는 원통함을 눈물로
토해내며 통곡했다고 하여 붙여졌다고 합니다.)
사형장
(사적 제324호. 1923년 지어진 목조건물로 형무소에 수감된
애국지사들이 순국하였던 장소, 사형장은 5m 높이의
담장으로 둘러싸여 외부와 철저히 격리. 사형장치는 교수형
집행을 위한 개폐식 미루판과 교수줄, 가림판 뒤쪽에
위치해 마루판을 밑으로 내리는 레버 장치로 구성.
마루판 아래 지하공간에 시신 수습실 배치. 2000년대
초반 뒤쪽의 깨진 유리창 사이로 사람의 형상이
촬영되었다는 소동이 벌어지는 등을 볼 때, 억울하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간 선열들의 아픔이 서려 있는 곳)
봉선화(鳳仙花)의 슬픈 전설(傳說)
고려 26대 충선왕이 몽고의 공주보다
조비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몽고의 서울로 붙들려 갔는데 그는
항상 고국을 그리워 했습니다.
그런데 왕은 어느날 한 소녀가 자기를
위해 가야금을 뜯는 꿈을 꾸웠
는데 줄을 뜯을 때마다 소녀의 열 손가락에선
피가 뚝뚝 떨어졌습니다.
깜짝 놀라 깨어난 왕은 하두 이상해서
궁녀를 모두 조사했더니 열 손가
락에 모두 흰 헝겁을 동여맨 눈먼
궁녀가 있어서 그 신분을 물었습니다.
그는 고려에서 온 궁녀인데 집이 그리워
울어서 눈병이 났고 손가락은
봉선화를 물들이기 위함이라 했습니다.
왕은 타국에서까지 자기 나라
풍습을 지키는 것이 기특해서 소녀와
이야기를 했더니 아버지는 충선왕
파라서 관직에서 쫓겨났다면서 충선왕께
바치라고 준비한 가락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것은 꼭 성공해서 고국에
돌아가시라는 가사가 곁들여 있는
가야금 가락이었습니다.
왕은 감격하여 그 후 노력한 결과 고려에
돌아 올수 있었고 왕위에 올랐습니다.
왕은 몽고에 억류돼 있을 때 소녀의 일을 생각
하고 불러오려고 했으나 이미 소녀는 죽은
후였습니다. 왕은 소녀를 기념하는
뜻에서 궁궐의 뜰에 많은 봉숭아를 심게
하였습니다. 이렇듯 봉선화에 얽힌
가슴아픈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우리 나라 현대사에도 민족의
저항을 표현하는 애창가곡 가사가 하나 더 있죠.
울 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 필적에 어여쁘신 아가시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어언간에 여름가고 가을바람
솔솔 불어 낙화로다 늙어졌다 네 모양이 처량하다
작곡 : 홍난파
노래 : 김천애
'역사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옛 선인들의 시와 동양화 / 충성 다한 성삼문 (0) | 2017.11.19 |
---|---|
[스크랩] 조선시대 천재기인 (0) | 2017.11.12 |
[책의 향기]메이지 일왕은 어떻게 근대화의 상징이 됐나 (0) | 2017.11.05 |
중국 모택동의 비밀 (0) | 2017.10.04 |
복직후 달라진 이순신, 선조 향해 망궐례 한차례도 안해 (0) | 2017.09.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