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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化踏査; 피맛골-大韓民國歷史博物館

청 송 2019. 3. 29. 16:30

文化踏査; 피맛골-大韓民國歷史博物館(3-1) (05-3)

 

                

            (97) 忠正公 閔泳煥 自決 터

       1905년 강제로 체결한 乙巳條約 당시 忠正公 桂庭 閔泳煥(1861~1905)

      이를 반대하는 上疏에 실패한 후 홰나무골 이인식의 사랑방에 피신하였다가

      11 30일 우리겨레에게 自主獨立精神을 고취하는 遺書를 남기고 自決한 곳이다.

 

      *遺書

       嗚呼! 나라의 恥辱과 백성의 욕됨이 이에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 경쟁 가운데서 盡滅하리라. 대개 살기를 바라는 사람은 반드시 죽고,

      죽기를 기약하는 사람은 도리어 삶을 얻나니 諸公은 어찌 이것을 알지 못하는가.

      단지 永煥은 한번 죽음으로 皇恩에 보답하고 우리 2천만 同胞兄弟에게

       사죄하려 하노라. 그러나 泳煥은 죽어도 죽지 않고 저승에서라도 제공을

      기어이 도우리니 다행히 동포형제들은 千萬 倍 더욱 奮勵하여 志氣를 굳게 하고

      學問에 힘쓰며 한 마음으로 힘을 다하여 우리의 自由獨立을 회복하면 죽어서라도

      마땅히 저 세상에서 기뻐 웃으리라. 오호! 조금도 실망하지 말지어다.

      大韓帝國 二千萬 同胞에게 죽음을 告하노라. (*: 부끄러울 치)

 

                 

             (98) 태화 빌딩  -泰和館이 있던 자리-

 

       *泰和館

             1919 3·1운동 당시 민족대표들이 모여 獨立宣言書를 낭독한 장소로,

 

             仁寺洞에 있던 요릿집인 明月館의 別館이다. 南監理敎會 財團이 인수하여

 

             헐리고 12층의 基督敎社會福祉館 건물 泰和 빌딩이 들어서 있다.

 

 

(99) 삼일독립선언 유적지[31獨立宣言 遺跡地]  -태화 빌딩 앞

 

(100) 순화궁 터[順和宮-] 標石

標石 文句: 朝鮮朝 憲宗의 후궁 경빈 慶嬪 金氏 사당인 순화궁(順和宮)이 있었던 자리이다.

 

 

*順和宮

仁寺洞에 있는 順和宮은 조선 24대왕 憲宗이 총애하는 後宮 慶嬪 金氏(1831~1907)

宮으로 지어준 곳으로, 主簿 벼슬에 있던 金在淸의 딸이며, 慶嬪 金氏는 이곳에서

<國忌服飾素膳><四節服飾資粧要覽>두 권의 책을 썼으며 이를 <順和宮帖草>라고도

부른다. <국기복식소선>은 王과 王妃의 忌日인 國忌에 妃嬪을 비롯한 內侍의 복색·머리모양·

화장·노리개·반지 등의 修飾의 服制에 관한 것이다. <四節服飾資粧要覽>은 궁중 제일의 명절인

誕日과 正月·冬至·望間(정월의 마지막 명일인 보름날)의 問安禮時의 복식을 설명한 것이다.

 

(101) 의금부[義禁府]

 

 

*義禁府.

朝鮮時代 官員∙兩班의 범죄 및 大逆罪, 綱常罪 등을 처벌하던 특별사법기관으로 王府,

執金吾, 禁府, 詔獄이라고도 했으며, 법을 다루기 때문에 刑曹, 漢城府와 함께 三法司라고도

불렸다. 義禁府는 王命을 받아 죄인을 다스리는 司法 전담기관으로 가장 중요한 사법기능은

王權을 確立∙維持하는 데 있었다. 왕권을 否定하는 叛亂, 陰謀, 亂言이나 妖言을 처단하는

것이다. 또한 조선시대의 支配理念인 儒敎道德에 어긋나는 綱常罪를 전담하여 治罪하였다.

그리고 왕의 敎旨를 받들어 推鞫하는 최고의 사법기관으로 다른 法司에서 조사했던 사건을

是正하거나 移管 받아 재판하였다. 의금부는 漢城府 中部 堅平坊(지금의 종로구 公平洞)

있었다. (*: 조서 조 *: 국문랄 국)

 

(102) 韓國天主敎 殉敎 터이며 信仰證據 터

 

피맛골

조선시대 鍾路는 宮闕과 官家가 가까워 가마나 말을 탄 高官大爵들의 왕래가 잦은 큰길이었는데

下級官僚나 庶民들은 鍾路를 지나다 말을 탄 高官을 만나면 行次가 끝날 때까지 엎드려 있어야

했다. 이 때문에 庶民들은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한길 양쪽에 나 있는 좁은 골목길로 다니는

習俗이 생겼는데, 종로를 지나는 고관들의 말을 피해 다니던 길이라는 뜻의避馬에서 유래하여

 피맛골또는 피마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 벼슬 작)

서민들이 이용하다 보니 피맛골 주위에는 선술집, 국밥집, 色酒家 등 술집과 음식점이

번창하였으며 원래는 현재의 종로구 淸進洞 종로 1가에서 6가까지 이어져 있었으나, 2009

淸進洞 再開發로 600년간 庶民의 哀歡이 서린 피맛골은 추억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으나 서울의

傳統 거리가 사라진다는 비판이 提起되어 旣存 개발지역을 제외하고 종로2가에서 종로6가에

걸쳐있는 피맛골을 修復再開發區域으로 지정하여 예전 피맛골의 모습을 再現하기로 했다.

 

(103) 피맛골 位置圖

 

(104) 市廛 行廊  -1,400채 이상의 巨大市場  조선시대 經濟文化의 중심

市廛은 조선시대에 雲從街 일대에 설치되었던 官營市場으로 전국의 財貨가 交流되는

朝鮮 商業의 중심지였다. 朝廷은 시전 행랑을 빌려주고 그 代價로 세금을 받았다.

太宗(재위 1400~1418) 때 鍾路와 南大門路를 따라 양쪽에 건물이 길게 늘어선 行廊을

造成하고 이곳에서 상업활동을 하게 했다. (*: 행랑 랑 *: 가게 전)

 

*六矣廛

육의전은 조선시대에 雲從街(世宗路)鐘樓(鍾路) 등 중심가에 자리잡고 王室ㆍ國家 儀式

需要를 도맡아 공급하던 여섯 종류의 御用商店으로 六注比廛ㆍ六   部廛ㆍ六分廛ㆍ六長廛ㆍ

六調比廛ㆍ六主夫廛 등 여러 가지 명칭이 있었다. 公廊市廛 중 경제적∙사회적으로 확고한

위치를 가진 線廛(비단)ㆍ綿布廛(무명)ㆍ綿紬廛(명주)ㆍ紙廛(종이)ㆍ苧布廛(모시ㆍ베)

內外魚物廛(생선) 6가지 종류의 상점을 六矣廛이라고 했다. (*: 명주 주 *: 모시풀 저)

 

(105) 조선시대의 淸進地區

현재 鍾路의 북쪽지역인 淸進地區 일대는 길가에 市廛 行廊이 즐비한 雲從街가 들어서고,

景福宮 및 六曹와 인접했으며, 義禁府, 壽進宮, 司僕寺, 濟用監 등 官營施設이 있었다.

이같이 官廳과 市廛의 背後地였던 淸進洞 일대는 부유한 市廛商人들과 관청에서 직책을

맡았던 中人들의 住宅이 하나의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 종 복 *: 관청 시)

 

(106) 漢陽의 中心 雲從街

雲從街는 市廛이 설치되어 수많은 店鋪들이 들어서 있던 곳으로 사람과 物貨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雲從街라고 불렀으며 經濟中心地로, 政治 一番地인 六曹거리와도 이어져

서울 600년의 모습이 지하 4~6m 깊이에 文化層別로 켜켜이 쌓인 채 보존되어 있는

朝鮮의 폼페이이기도 하다. <청진 12~16지구 문화재 보존 및 전시간>은 鍾路區

淸進洞 119-1번지 일대에 있는 建物趾, 우물, 도로 등 遺構를 保存∙展示하는 공간이다.

서울 땅 아래 고스란히 살아 숨쉬는 조선시대 雲從街와 600년 역사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雲從街의 위치는 대략 惠政橋(광화문 우체국 동쪽)부터 鐵物橋(종로 3가 입구)였으나,

太宗 5년 규모를 확장하면서 지금의 安國洞으로부터 廣橋 일대까지 확대되었다.

 

(107) 사람만을 위한 길, 피맛길 (*글씨가 잘 안보여 베껴 썼음)

피맛길은 너비 2.3~3.8m의 작은 길로 1412년에 市廛 行廊을 조성하면서 만들었다.

초기 피맛길의 너비는 약 6m 정도였으며, 六矣廛 長廊의 뒷물길로 조성되었다.

17세기 이후 물길이 메워지고 앞뒤 집들이 확장되면서 점점 좁아져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피맛길이 되었다. 피맛길은 서울의 모든 작은 길과 마찬가지로 乾田으로서 비가 오면 물이

넘치고 마른 날은 河水를 한쪽으로 받아서 길로 이용했다.

 

(108) 朝鮮時代의 鍾路

 

(109) 조선시대의 水資源, 우물 (*글씨가 흐려 베껴 썼음)

淸進 8지구 우물은 築造方式과 재료가 우수하고 특히 남쪽에 排水路의 보강을 위해 2단 이상의

板材를 사용하여 구축하였다. 우물 주변에는 薄石을 깔아 排水가 잘되게 하고 접근하기 쉽게

했다. 世宗 8(1426) 世宗이 漢陽의 각 官廳에 우물을 2개씩 파서 물을 저장하라고

下命하여 국가에서 만든 行廊과 인근의 火災에 對備했다. 나라의 우물이었던 청진 8지구

우물은 都城民의 食水 확보에도 도움을 주었다. (*: 엷을 박)

 

(110) 피맛골[避馬골, 피맛길)

 

(111) 종로 1, 북쪽으로 뻗은 모습, 中學川이 있던 곳인가 보다.

 

*中學川: 조선시대 중등교육기관인 中部學堂, 中學이 있던 데서 유래된 이름.

北岳山 남서쪽에서 흘러내려 景福宮의 東門 建春門 앞을 지나 지금의 栗谷路를 가로질러

大韓民國歷史博物館과 美國大使館 뒤쪽을 거쳐 淸溪川에 합류하는 하천이다.

조선시대에는 淸溪川의 支川 가운데 가장 큰 하천이었으나 1957년 도시정비를 목적으로

覆蓋되어 물길을 볼 수 없게 되었다. (*: 다시 복 *: 덮을 개)

2009년 서울시에서는 都心의 역사와 장소를 회복하고 문화관광벨트로 조성하는 동시에

시민들을 위한 쉼터를 마련하고자 中學川 復元工事를 추진하였다.

 

(112) 혜정교 터[惠政橋 趾]

 

*鍾路區 종로1가 光化門郵遞局 부근에 있던 다리로, 광화문 북쪽에서 흘러내린 中學川이

淸溪川으로 유입되는데 鍾路 쪽에 놓인 다리이며, 惠橋라고도 했다.

이 다리 옆에 右捕盜廳이 있어 포청다리라고도 불렀으며, 六曹 官衙가 집중되어 있는

육조거리 동쪽에 있어 일명 官街다리라고도 불렀다.

<京都五部北漢山城附圖>에는 歲長橋라고 표기했으며, 1926년 道路를 改修하면서

石橋를 콘크리트교로 개축하고 福淸橋라고 했다. 太宗 12(1412) 開川工事 할 때

大廣通橋와 小廣通橋 등과 함께 架設한 다리이며, 이곳에서 貪官汚吏에 대한 烹刑 또는

刑을 시행하였다. (*: 삶을 팽)

 

(113) 橫步 廉想涉의 像

 

橫步 廉想涉(1897~1963): 小說家, 서울 출생.

1920년 文藝同人誌 <廢墟>의 創刊 同人으로 新文學運動을 시작한 이래

<표본실의 청개구리>, <三代> 등 많은 작품을 발표, 韓國의 小說發展에 크게 기여했다.

 ’96 文學의 해에 橫步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生家 터 부근에 이 像을 세운다 

                                   - 1996 10월 일

橫步 廉想涉의 像 移轉

1990년 文學의 해를 기념하여 韓國 近代文學의 대표인물로 선정되어 橫步 廉想涉의 像을

宗廟廣場에 설치하였다. 2009년 종묘광장을 정비할 때 北岳山 동쪽기슭의 三淸公園으로

移轉하였으나 橫步의 位相에 걸맞고 市民들의 接近이 쉬운 곳에 있어야 한다는 文化界와

市民社會의 여론에 따라 이곳으로 移轉∙設置하였다.    -2014 4 1 -

(114) 서울 高宗 御極 40年 稱慶 紀念碑殿

 

*서울 高宗 御極 40 稱慶紀念碑  -사적 제171-

高宗(재위 1863∼1907)이 王이 된지 40주년과 寶齡 51세에 耆老所에 들어 간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碑石으로 紀念碑殿 안에 있다. 이 비석은 高宗이 처음으로 나라 이름을

大韓帝國으로 고치고 皇帝 稱號를 사용한 것을 기념하는 의미도 담겨 있다.

碑石은 龜趺, 碑身, 螭首로 구성되어 있으며, 篆額은 皇太子 때 純宗 글씨로

[大韓帝國大皇帝 寶齡望六旬 御極四十年 稱慶紀念頌]이라고 쓰고, 碑文은 議政 尹容善이

짓고, 陸軍副射 閔丙奭이 썼다. (*: 늙을 기 *: 거북 귀 *: 책상다리할 부 *: 교룡 이

                                         *: 벼슬이름 야)

碑를 보호하기 위한 紀念碑殿은 앞면 3칸∙옆면 3칸의 亭子形 건물로 基壇 둘레에 돌난간을

설치하였다. 이 건물의 남쪽에 설치한 門은 돌기둥을 세우고 鐵門의 가운데 칸에는 무지개

모양의 돌을 얹어萬歲門이라는 이름을 새겨 넣었다. 紀念碑殿은 20세기초 전통적인

건축양식의 틀이 解體되기 직전에 세워진 건물로 당시 이러한 유형의 건물 중 아름다운

건물이며, 이 시기에 세운 德壽宮의 다른 여러 건물과 함께 중요한 연구자료이다.

 

*耆老所는 正二品 이상의 文官 중 70세 이상 된 사람을 優待하는 제도로,

 高麗의耆英會를 계승한 官制로 太祖가 60세 되던 해에 기영회에 들어갔는데, 世祖 때

 耆老所로 명칭을  바꾸었으며, 太祖 이후 왕들이 오래 살지 못해 기로소에

 들어가는 이가 없어 肅宗과 英祖 등이 60세를 바라보는 나이(望六旬)라 하여 앞당겨

 들어간 것을 본받아 高宗은 신하들의 건의에 따라 51세에 들어가게 되었다.

 

(115) 서울시 道路元標

道路元標는 도로의 起點, 終點 또는 經過地를 표시하는 것으로, 設置에 관한 사항은

道路法 施行令과 施行規則으로 정하고 있다. 서울시 도로원표는 稱慶紀念碑殿에 있다.

원래는 京城府 光化門通(世宗路) 중앙인 현재 李舜臣 將軍 銅像 터에 설치하였으나

1935년 기념비전 옆으로 옮겼다. 距離單位 日本式 (km)으로 표기되었다.

                                                                      (*: 킬로미터 천)

 

(116) 황토마루[黃土峴]

鍾路區 世宗路와 新門路∙鍾路가 갈리는 네거리 남쪽 세종로사거리에 있던 나지막한 고개로,

이 고개가 黃土로 이루어져 있어 황토마루[黃土峴]라고 했다. 景福宮 정문인 光化門 남쪽

양쪽으로 議政府 ·六曹 ·中樞院 ·司憲府 ·漢城府 등의 官衙建物들이 있는 六曹거리는

東大門과 西大門을 잇는 幹線道路와 만나면서 끝나고 그 남쪽이 바로 황토마루였다.

 

(117) 敎保 빌딩에 걸린 대형 太極旗

 

(118) 光化門廣場에서 解說을 듣고 있는 문화답사회원들

 

*光化門廣場  -길이 557m, 너비 34m  -2009.08.01 開場

 600여 년 역사를 지닌 서울의 중심거리 世宗路를 차량 중심에서 인간 중심의 공간으로

전환하고, 景福宮과 北岳山 등 아름다운 自然景觀 眺望空間으로 새롭게 조성하며, 世宗路의

옛 모습인 六曹거리 復元을 통한 歷史∙文化 體驗空間으로 재탄생 시키기 위한 사업으로

추진되었다. 세부 구간은 '光化門의 역사를 회복하는 광장' '六曹거리의 풍경을 재현하는

광장' '한국의 대표 광장' '시민이 참여하는 도시문화 광장' '도심 속의 광장' '청계천 연결부

'로 나누어진다. (*: 바라볼 조)

 

                

             (119) 忠武公 李舜臣 將軍 銅像   -1968.04.27 건립

         전체 높이 17m(銅像 6.5m, 基壇 10.5m)의 靑銅 立像이며,

         주변 造形物로 거북선 모형 1개와 북 2개가 있다.

 

(120) 거북선 모형

 

(121) 世宗大王 坐像  -2009년 건립

銅像 높이 6.2m, 4.3m이며 基壇 위에 坐像은 남쪽을 향하고 있다.

     세종대왕은 민족의 英雄으로 景福宮에서 卽位하여 昇遐하신 최초의 임금이었던 역사적

     사실 등을 고려해 세종대왕 동상을 건립하여 民族의 自矜心을 높이기 위해 세종대왕 동상을

     건립하였다. (*: 멀 하)

 

(122) 世宗大王 坐像 앞에 전시한 渾天儀 - 測雨器 仰釜日晷 模型

世宗大王 坐像 앞에 渾天儀(天體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여 天文時計), 測雨器(世宗 때

이후부터 末期에 이르기까지 降雨量을 측정하던 器具), 仰釜日晷(17~18세기에 제작된

해시계)를 만들어 전시했다. (*: 뒤섞일 혼 *: 우러를 앙 *: 그림자 구)

 

                   

               (123) 獨立協會 創立總會 터

         獨立協會는 高宗 33(1896) 7 2일 六曹거리에 있던 外部에서

         創立總會를 갖고 設立한 한국 최초의 근대적인 社會政治團體이다.

         정부의 外勢依存政策에 반대하는 開化 知識層이 韓國의 自主獨立과

         內政改革을 標榜하고 활동하였다. <독립신문>을 발간하여 민중계몽에

        나선 徐載弼을 중심으로 李商在∙李承晩∙尹致昊 등이 적극 참여했다.

                                                                (*: 방 붙일 방)

 

 

大韓民國歷史博物館

 

鍾路區 世宗路 前 政府廳舍 건물에 있는 大韓民國歷史博物館은 19세기 末 開港期부터

현재까지의 大韓民國 歷史를 다루는 국내 최초의 國立 近現代史 博物館으로 2012.12.26

開館하였다.

展示室은 1층의 어린이체험전시실, 1층과 3층의 企劃展示室 두 곳, 3층부터 5층까지 常設展示室

네 곳으로 구성되었다.

상설전시실은 時代順으로 구성되어 3층 제1전시실은 1876~1948년 大韓民國의 胎動이라는

主題로 대한민국 臨時政府와 獨立運動, 光復에 대하여 다룬다. 4층 제2전시실은

1948~1961년까지 大韓民國 政府樹立과 6∙25戰爭 및 戰後 復舊, 2공화국까지의 國家土臺

構築過程 등을 보여준다. 5층 제3전시실은 1961~1987년까지 대한민국의 成長과 發展을

主題로 經濟開發과 産業化, 변모하는 도시와 농촌, 民主化 運動 등을 다루고 있으며, 4전시실은

1987~현재까지 대한민국의 先進化, 세계로의 跳躍이라는 주제로 전시하고 있다.

 

(124) 大韓民國歷史博物館

 

(125) 로비에 걸어놓은 [31獨立宣言書]

 

 

大韓民國의 胎動

 

(126) 1전시실; 大韓民國의 胎動

大韓民國의 胎動(1876~1945)은 조선이 江華島條約 체결 이후 세계에 門戶를 개방한

1876년부터 大韓帝國, 日帝强占期, 1945년 光復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전시하고 있다.

 

(127) 太極旗 

*畵面이 바뀔 때 찍어 太極의 圓이 二重이 되었다.

 

(128) 최초로 美國에 派遣된 報聘使 一同

세계 각국과 條約締結

1876년 朝鮮은 日本과 江華島條約을 체결하고, 그 후 淸의 알선으로 美國과 守護通商條約을

체결했으며 이어서 英國, 獨逸, 러시아, 프랑스 等과 조약을 체결했는데 이들 조약은 모두

不平等條約이었다.

 *報聘使: 外國에 友好, 親善 및 交涉을 위한 報聘(答禮로 외국을 방문함) 名目으로 파견하는

             使節團. (*: 부를 빙)

 

(129) 데니(O. N. Denny) 太極旗   -등록문화재 제382-   -1890년경

高宗이 政治外交顧問 데니(Owen N. Denny)에게 下賜한 태극기로 데니가 美國으로

歸國할 때 가져간 것을 그의 後孫 랠스턴(William Ralston) 1981년 우리나라에 기증하였다.

크기는 가로 262cm, 세로 182.5cm이며 現存하는 가장 오래된 太極旗로, 보존상태도 좋아

우리나라의 國旗變遷史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130) 日本의 國權侵奪

러일전쟁 후 英國, 美國, 러시아 등 列强으로부터 韓國에 대한 支配權을 승인 받은 日本은

1905년 韓國의 外交權을 박탈하는 乙巳條約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131) 愛國啓蒙運動

韓國이 日本에게 外交權을 빼앗기고 內政干涉까지 이르자 國權守護를 위해 힘을 기르자는

啓蒙運動이 일어났다. 大韓自彊會는 敎育振興과 産業育成 등 實力養成을 통한 국권수호운동을

 벌였다. 新民會는 大成學校, 五山學校 등 近代學校를 설립하고 산업진흥활동을 벌였으며,

軍事力을 기르기 위해 國外 獨立軍基地 건설에 나서고, 國債報償運動도 전개했다.

 

(132) 義兵抗爭

國權을 守護하기 위해 義兵이 봉기하였다. 明成皇后 弑害와 斷髮令에 항의하는 乙未義兵,

乙巳勒約(條約)에 항의하는 乙巳義兵, 高宗退位와 軍隊解散에 항의하는 丁未義兵이 차례로

일어났다.

 

(133) 通信院揭揚 태극기 - 不遠復 太極旗 - 大韓民國 臨時政府議政院 태극기 (*: 걸 게)

=대한제국 통신원 게양 추정 태극기(1900)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불원복[不遠復] 태극기(1907)  -등록문화재 제394 -독립기념관 소장

 *조선 말기 義兵將 高光洵(1848~1907)이 사용한 태극기로 붉은 색실로 '不遠復'(머지않아

             국권을 회복한다)이라는 글자를 수놓았다. (*: 참으로 순)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태극기(1923)  -서울시 등록문화재 제395-2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

 

(134) 國旗의 標準規格

 

(135) 우리말, 우리이름의 喪失

*나는 1945 815해방 때 國民學校 3학년이었는데 이름과 姓을 일본식으로 創氏改名하고,

 매주 月曜日 아침에는 운동장에서 全校生이 朝會할 때 皇國臣民誓詞를 提唱하고, 동쪽을

 향해 日本天皇에게 머리 숙여 절하는 행사가 빠지지 않았다.

 

(136) 서울 南山에 건립한 日本神社

 

*木覓山(南山)에는 太祖 李成桂가 나라의 안녕을 祈願하는 守護神堂으로 國師堂이 있었으나

 日帝가 이를 仁王山 남쪽 자락으로 옮기고 1925년 祭神이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

 朝鮮神宮을 건립했다. 이후 전국 坊坊曲曲의 面 單位까지 日本神社를 건립하고 국가적 단합을

 추구한다는 名目으로 학교 단위로 학생들까지 강제로 神社參拜에 동원하였다.

 *天照大神: 日本神話에 등장하는 太陽神으로, 日本天皇의 祖上神.

 

                

             (137) 皇國臣民誓詞之柱 碑石  -1940

         韓國人을 강제로 皇國臣民으로 만들기 위하여 朝鮮總督府가 朝鮮

        곳곳에 세운 비석이다.

 

     *皇國臣民誓詞

    1937 10월에 제정되어 兒童用과 中等學校 이상의 학생 및 一般用

    두 종류가 있다. 아동용의 내용은나는 大日本帝國의 臣民이다.’,

    ‘나는 마음을 합해 天皇에게 忠誠을 다한다.’, ‘나는 忍苦 鍛鍊하여 훌륭하고

    강한 國民이 된다.’이고, 成人用 皇國臣民誓詞는우리들은 皇國臣民이다.

    忠誠으로써 군국에 보답하자.’, ‘우리들 황국신민은 서로 신뢰, 협력하여 단결을

    굳게 하자.’, ‘우리들 황국신민은 인내, 단련의 힘을 길러 皇道를 선양하자.’이다.

     이 誓詞는 학교를 비롯하여 관공서, 은행, 회사, 공장, 상점 등 모든 직장에서의

    조회 또는 회합에서 제창되었다.

 

(138) 戰爭 强制動員

 *徵兵으로 强制 入隊하는 청년들을 태운 列車가 떠날 때는 국민학교 학생들도 軍歌를

  부르며 歡送行事에 동원되었다. 나도 여러 번 갔었다.

 

(139) 日本軍 入隊 前 兄弟寫眞 朝鮮人 志願兵 훈련을 소개한 日本新聞

                                             國民總力 朝鮮聯盟 포스터

*國民總力 朝鮮聯盟

中日戰爭 발발 이후 戰爭時局에 대한 협력과 朝鮮 民衆에 대한 강력한 통제, 後方活動의

여러 문제를 처리하기 위하여 1940년 朝鮮總督府 차원에서 조직된 親日團體이다.

 

(140) 美洲地域 示威 太極旗   -독립기념관 소장  -복제

美洲 韓人同胞들이 1919 4 16일 필라델피아에서 獨立宣言式을 거행하고

시위 행진할 때 사용한 태극기이다.

 

(141) 太極旗 木板  -등록문화재 제385  -1919 -독립기념관 소장  복제

3∙1운동 때 태극기를 大量으로 찍는데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가로 32cm, 세로 30cm,

두께 6.5cm의 太極旗 木板으로 1985 3월 南宮 用이 獨立記念館에 기증했다.

 

(142) 31獨立宣言書 (複製) 

3∙1운동 때 民族代表 33인이 낭독한 獨立宣言書이다. 民族自決原則에 입각하여 韓國의

독립을 선언하고, 人道主義에 기초를 둔 非暴力的이고 平和的인 獨立方案을 제시하였다.

獨立宣言書에는 天道敎界 15, 基督敎界 16, 佛敎界 2인 등 33인의 民族代表가

서명하였다.

 

(143) 大韓民國 臨時政府의 移動

 

(144) 大韓民國 臨時政府 對日 宣戰 聲明書 (복제)  -1941

 

(145) 金佐鎭 將軍 略曆書 (복제)  -1930  -독립기념관 소장

 

*金佐鎭1889~1930)  -충남 洪城 출생  -雅號 白冶

光武 9(1905) 上京하여 陸軍武官學校에 입학, 1907년 고향에 돌아와 家産을 정리하여

湖明學校를 설립하는 등 愛國啓蒙運動을 하다가 다시 상경하여 島山 安昌浩 등과 함께

西北學會를 조직하였다. 1911년 軍資金을 모금하다 일본경찰에 逮捕∙投獄되어

2 6개월 간 服役했으며, 1915년 秘密結社 조직인 大韓光復會에 가입, 1918년 滿洲로

亡命하였다. 1919년 大韓正義團의 軍政府를 大韓民國 臨時政府 휘하의 北路軍政署

改編하고 총사령관이 되었으며, 1920 10월 李範奭 장군 등과 함께 靑山里戰鬪에서

日本軍 3,300명을 섬멸하는 戰果를 올렸다. 1925년 新民府를 창설하고 城東士官學校를

설립하여 獨立軍 幹部 양성에 주력하였으며, 1929년 韓族聯合會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1930년 中東鐵道 山市驛 부근에서 高麗共産靑年會 金鳳煥의 使嗾로 朴尙實의 흉탄에

殉國하였다. 1962년 建國勳章 大韓民國章이 追敍되었다. (*: 부추길 주)

 

                 

             (146) 光復 前後期 우체통  -등록문화재 제437  -1940

         日帝强占期부터 光復 直後까지 사용한 우체통으로 日本式 郵便 마크 위에

         페인트로 덧칠하여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