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관련 사진,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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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송 2012. 6. 27. 08:46

한국전쟁 자료

 

 

***** 6, 25. 전화(戰禍) *****

 

다시 보기 어려운 처음 공개 귀한 자료

 

 아래 사진은 결코 잊지 말아야죠.  

 

  

▲ 1950. 9. 30. 전화(戰禍)로 폐허가 된 대전역 

 

 

▲ 1950. 11. 24. 불타버린 서울역 앞 세브란스 병원.
 
 
 ▲ 1950. 10. 7. 불타고 있는 김포 비행장 
 
 
  
▲ 1950. 10. 18. 전화에 그을린 중앙청 
 
 
  
▲ 1950. 10. 18.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 
멀리 북악산과 중앙청 돔이 보인다 
 
 
  
▲ 1950. 9. 20. 왜관, 낙동강 철교 복구 공사 
 
 
  
▲ 1950. 10. 12. 미조리호 군함에서
청진항을 향해 함포사격을 가하고 있다 
 
 
  
▲ 1950. 10. 20. 400여 명의 낙하산 
부대가 평양부근에 투하되고 있다 
 
 
  
▲ 1950. 12. 18. 북한군에게 뿌린 귀순 권유 전단 
 
 
  
▲ 1950. 11. 2. 적십자사에서 피난민에게 구호물자를 나눠주고 있다 
 
 
  
▲ 1950. 10. 13. 경기도 파주, 참혹하게 학살된 시신들 
 
 
 
 ▲ 1950. 11. 1. 서울 중앙청 앞
주민들이 폐허더미에서 땔감이나 돈이 될만한 물건을 찾고 있다 
 
 
 
▲ 1950. 11. 2. 원산의 한 성당, 폐허가 된
성당 내부를 신도들이 청소하고 있다 
 
 
 
▲ 1950. 11. 6. 북한의 어느 농촌, 탈곡한 볏단을 달구지에 싣고 있다 
 
  
▲ 1950. 11. 6. 북한의 어느 농촌, 전란 중에도 추수를 하고 있다.
바람개비로 알곡을 가리는 농부들 
 
 
  
▲ 1950. 11. 19. 북한의 한 지하 무기 공장 내부 
  
1950. 11. 20. 국경지대, 미군들이 소달구지로 보급품을 운반하고 있다 
 
 
  
▲ 1950. 11. 18. 미군 폭격으로 파괴된 흥남 비료공장 
 
 
  
▲ 1950. 11. 18. 미군 폭격으로 파괴된 흥남 송전소 
 
 
  
▲ 1950. 11. 23. 함경도 갑산, 미군 폭격으로 성한 집이 드물다 
 
 
  
▲ 1950. 11. 1. 황해도 평산에 진격하는
유엔군을 두 여인이 전신주 뒤로 불안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 
 
 
  
▲ 1950. 12. 4. 평양을 떠나 대동강을 건너 후퇴하는 국군 
 
 
  
▲ 1950. 12. 6. 황해도 사리원, 남행하는
피난열차에 피난민들이 몰려들고 있다 
 
 
  
▲ 1950. 12. 8. 경기도 금촌, 38선을 넘어 후퇴하는 유엔군 차량들 
 
 
  
▲ 1950. 12. 9. 끊어진 한강철교 
 
 
  
▲ 1950. 12. 10. 포화에 불타는 마을 
 
 
  
▲ 1950. 12. 12. 한강 부교를 통하여 후퇴하는 차량들 
 
 
  
▲ 1950. 12. 12. 피난민들이 한강을 나룻배로 건너고 있다 
 
 
  
▲ 1950. 12. 12. 유엔군들이 인천항을 통해 장비들을 후송시키고 있다 
 
 
  
▲ 1950. 12. 12.
유엔군들이 후퇴하면서 다리를 폭파시키고자 폭약을 장치하고 있다 
 
 
  
▲ 1950. 12. 3. 평양, 남행 피난민 행렬 속의 한 소녀. 
 
 
  
▲ 1950. 12. 10. 중공군의 참전으로 강추위 속에 후퇴 행렬.
한 병사가 너무 추운 날씨로 모포를 뒤집어쓰고 있다 
 
 
  
▲ 1950. 12. 12. 흥남부두, LST 함정에 가득 탄 군인과 피난민들.
미처 함정에 오르지 못한 피난민들이 발을 동동거리고 있다.
 
대부분의 피난민들은 원자탄이 투하된다는
말에 피난 행렬에 나섰다고 한다.
 
몇 날의 피난 길이 50년이 더 지났다. 
 
 
  
▲ 1950. 12. 14. 서울역, 남행 피난민들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 1950. 12. 16. 흥남, 국군과 유엔군들이
후퇴하고자 부두에서 수송선을 기다리고 있다.
 
 
  
▲ 1950. 12. 27. 흥남, 얕은 수심으로 수송선이 해안에
 닿을 수 없자 유엔군들이 바다에 뛰어들어 LST로 가고 있다
 
 
  
▲ 1950. 12. 24. 흥남, 유엔군들이 철수 후 부두를 폭파시키고 있다
 
 
  
▲ 1950. 12. 19. 묵호, 흥남에서 철수한 장비를 묵호(동해)항에 내리고 있다
 
 
  
▲ 1950. 12. 28. 서울, 피난민들이 강추위 속에
한강 얼음을 깨트리며 나룻배로 남하하고 있다
 
 
  
▲ 1951. 1. 5. 피난 행렬 속의 소년과 소녀.
소달구지가 힘겨워하자 힘을 보태고 있다 
 
 
 
 ▲ 1950. 10. 11. 서울 교외, 부서진 북한군 전차 위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다.
 
 
  
▲ 1950. 11. 1. 전란으로 폐허가 된 서울
 
 
  
▲ 1950. 12. 28. 끊어진 한강 철교, 오른쪽은 임시로 만든 부교
 
 
  
▲ 1951. 1. 3. 한강 철교 부근의 언 강을 피난민들이 걸어서 건너고 있다
 
 
  
▲ 1951. 3. 16. 서울 중구의 수도극장(현 스카라 극장) 일대
 
 
  
▲ 1951. 3. 16. 하늘에서 내려다 본 중앙청 광화문 세종로 일대.
 
 
 
 ▲ 1951. 3. 16.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왕십리 일대,
멀리 고려대학교 건물이 보인다 
 
 
 
 ▲ 1951. 3. 16. 하늘에서 내려다 본 서울역 일대
 
 
 
 ▲ 1951. 3. 16. 하늘에서 내려다 본 중앙청,  
경복궁, 수송동, 팔판동 일대.
 
  
▲ 1951. 3. 19. 구호 양곡을 먼저 탄 소년과  
양곡을 타기 위해 줄을 선 주민들 
 
 
▲ 1950. 10. 12. 원산. 학살된 시신들 
 
 
▲ 1950. 12. 11. 고단한 피난길
 
 
▲ 1950. 12. 16. 폭격에 엿가락처럼 휘어진 철교.
 
 
▲ 1950. 12. 17. 보급품을 실은 화물 열차가 폭격에 불타고 있다
 
 
▲ 1950. 12. 18. 대구.
 
훈련소에서 교육을 마친 신병들이 전선으로
가고자 대구역전 광장에 집결해 있다
 
 
 
 ▲ 1950. 12. 18. 전방으로 떠나는 신병들
 
 
  
1950. 12. 18. 대구역. "총알을 요리조리 잘 피해서
어예든동 살아오이라.
" '어무이 걱정 꽉 붙들어 매이소. 어무이 아들 아잉기요.
내는 꼭 살아돌아올 깁니다." 
 
 
  
 1950. 12. 21. 경북 왜관. 낙동강 철교 어귀에 부서진 북한군 소련제 탱크
 
 
  
▲ 1951. 1. 20. 아버지와 아들의 피난길, 다른 가족은 전란에 모두 죽었다
 
 
 
 ▲ 1950. 6. 18. 6.25 한국전쟁 발발 일주일 전
의정부 북방 38 접경에서 미 국무장관 덜레스
(가운데)  일행이 38선 너머 북쪽을 살피고 있다
 
(덜레스 오른쪽 신성모 국방장관).
  
 
  
▲ 1950. 6. 18. 미 국무장관 덜레스 일행이 38 접경 지대를 살피고 있다
 
 
 
  
▲ 1950. 7. 한미 수뇌부들이 환담하고 있다
(왼쪽부터 조병옥 내무장관, 신성모 국방장관,
무초 주한 미대사,
임병직 외무장관, 워커 주한 미군 사령관). 
 
 
  
▲ 1950. 7. 26. 맥아더 장군이 전선을 시찰하는 중,
종군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오른쪽 워커 장군 
 
 
 
▲ 1950. 8. 15.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국방장관이
8.15 경축식을
끝낸 임시 국회의사당인 문화극장을 떠나고 있다.
신 국방장관은 “아침은 서울에서 먹고, 점심은 평양에서…”
라고 상대의 전력도 모른 채 큰 소리쳤으나
6.25 발발 후 서울시민은 팽개치고 몰래 서울을 빠져나갔다 
 
 
▲ 1950. 8. 18. 백선엽 장군(가운데)이 미군과 함께 작전을 세우고 있다.
 
 
▲ 1950. 9. 16. 구포 신병 훈련소에서 훈시하는 이승만 대통령
 
 
  
▲ 1951. 2. 7. 전선을 시찰하는 맥아더 장군.
 
 
▲ 1951. 2. 15. 대한민국 해상 이동방송선(HLKT)을 방문한 장면 총리 일행
 
 
 ▲ 1951. 9. 콜트 미 8군 부사령관의 이임식장
(왼쪽부터 허정, 콜트. 무초 주한 미대사).
 
 

 

여기 실린 사진은 미국 메릴랜드 주에 있는 NARA(국립문서기록보관청,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5층 사진자료실에 보관된

 "KOREA WAR(한국전쟁)" 파일의 새로운 공개되지않은 사진들입니다.
날짜와 장소는 사진 뒷면에 있는 영어 원문을 따랐고, 사진 설명은 원문을

참조하여 필자가 가다듬었습니다.

이 사진이 기록물이 부족한 우리나라에 자료로 남기를 바랍니다.
생사가 교차되는 전선에서 귀한 사진을 남긴 카메라맨들에게 경의를

드립니다.



▲ 1950. 10. 22. 평양, 북한 주민의 학살 현장. 누가 그들을 죽였을까?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11. 2. 거리에 버려진 아이들이 트럭에 실려 고아원으로 가고 있다.

눈망울이 초롱한 아이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11. 11. 바지 저고리들의 포로들. 총이나 한 번 제대로 잡아보고

포로가 되었는지?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11. 13. 함흥 덕산광산, 482명을 생매장한 갱도에서 시신을 꺼내 늘어놓은 것을 한 아버지가 아들을 찾고 있다. "제발 내 아들이 아니기를..."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11. 13. 지아비가 생매장된 갱도 어귀에서 오열하는 지어미.

 "날라는 어찌 살라하고 가시리잇고"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12. 북한군 포로.ⓒ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10. 폭격으로 불타는 마을ⓒ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7. 29. 경북 영덕, 남자는 등에 지고 여자는 머리에 이고

지향없이 떠나는 피난민 행렬.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7. 29. 경북 영덕, 논두렁에 머리를 처박고 죽은 북한군 병사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7. 29. "뜨거운 전우애" 한 병사가 부상당한 전우를 업어가고 있다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7. 29. 마을 소년들이 주먹밥을 만들어 군인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7. 29. 야간전투후 주간 취침.ⓒ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7. 29. 취침 후 병기 손질ⓒ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4. 피난민들의 보금자리 산동네 판자촌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8. 누가 이 아이를 버리게 했을까?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1950. 8. 3. 뙤약볕 속에 전선으로 가는 국군 행렬

ⓒ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3. 한국전쟁 무렵의 부산항, 멀리 영도가 환히 보인다.

ⓒ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7. 29. 경남 진주 부근에서 생포한 빨치산(?).

원문은 포로로 되어 있다.ⓒ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12. 16. 흥남부두. 후퇴하려고 수송선을 기다리는 병사들

ⓒ2004 미국국립문서보관기록소





▲ 1950. 12. 18. 흥남에서 묵호(동해)로 후퇴한 후 수송선에서 내리는 병사들ⓒ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12 24. 유엔군 후퇴 후 텅 빈 흥남부두

ⓒ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12. 24. 유엔군 후퇴 후 불타는 흥남항 ⓒ2004 박도





?1950. 12. 26. 전차도 후퇴대열에. 흥남항에서 출발해 부산항에

도착하고 있다 ⓒ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12. 27. 인천항에서 출발해 부산항에 도착한 피난민들

ⓒ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1. 3. 1·4 후퇴를 앞두고 불타고 있는 서울 시가지

ⓒ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1. 1. 5. 1.4 후퇴 피난민 행렬 ⓒ2004 박도





▲ 1951. 1. 5. 언 한강을 피난민들이 걸어서 건너고 있다

ⓒ2004 박도


 

▲ 1951. 1.4. 한강나루터에서 건너야 할 강을 바라보는 피난민 아이들

ⓒ2004 박도




▲ 1951. 1. 4. 한강 임시 부교 ⓒ2004 박도




▲ 1950. 12. 29. 양평 , 생포된 포로들 ⓒ2004 박도




▲ 1950. 11. 29. 최전방의 간호사들 ⓒ2004 박도

 



▲ 1951. 1. 6. 수원역에서 남행열차를 기다리는 피난민들 ⓒ2004 박도



▲ 1951. 1. 5. 한미 합작의 한국군 병사 장비. 신발, 겉옷 , 모자 : 한국제.

코트, 소총, 탄환 : 미제 ⓒ2004 박도





▲ 1951. 1. 5.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고 미군 부대에 몰려온 한국의 노무자들

ⓒ2004 박도




▲ 1951. 1. 4. 무개화차에 몰린 피난민들 ⓒ2004 박도





▲ 1950. 12. 1. 부산 임시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를 등록하려고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1. 1. 16. 대구 근교 신병훈련소에서 신병들이 M1 소총 사격 교육을

받고 있다. ⓒ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1. 1. 4. 대구 근교 신병훈련소에서 신병들이 PRI(사격술 예비훈련)을

받고 있다. ⓒ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11. 5. 국군과 유엔군이 수복한 북한의 어느 지역(평산)에서 주민들이 지역 대표와 치안대장을 뽑고 있다. 그들 대표는 무슨 색깔의 완장을 찼을까?

ⓒ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1. 1. 5. 서울. 꽁꽁 언 한강을 피난민들이 조심조심 건너 남하하고 있다.ⓒ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9. 22. 전쟁에는 2등이 없다. 포로가 되는 순간부터 치욕이다. 미군들이 생포된 포로의 온 몸을 수색하고 있다.ⓒ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9. 20. 미군이 인민군 포로들을 발가벗긴 채 수색하고 있다

.ⓒ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9. 17. 인천. 유엔군 인천상륙작전 후 함포사격 포화에 무너지고

그을린 인천시가지 ⓒ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9. 18. 인천에 상륙하기 위해 전함에서 병사들이 하선하고 있다.

ⓒ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1. 5. 28. 38선 부근 6마일 남쪽 마을에서 탱크의 포화소리에 귀를 막는 소년들. 이들의 누더기 바지 차림이 그 무렵 소년들의 대표적 옷차림이다.

ⓒ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18. 애송이 북한군 소년 포로를 미군 포로심문관이 취조하고 있다. 곁에는 통역 겸 여비서라고 표기돼 있다. 엄마 젖 떨어진 지 얼마나 되었을까?ⓒ2004 NARA





▲ 1950. 8. 18. 임시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의 신상명세서를 만들고 있다

ⓒ2004 NARA




▲ 1950. 8. 18. 포로수용소 전경 ⓒ2004 NARA





▲ 1950. 8. 18. 포로수용소 천막 안에서 밥을 먹고 있다 ⓒ2004 NARA





▲ 1950. 8. 18. 포로들이 줄을 서서 밥을 타고 있다 ⓒ2004 NARA




▲ 1950. 8. 11. 그해 여름 피난민들의 움막. 필자도 이런 곳에서 지냈던

기억이 난다. ⓒ2004 NARA





▲ 1950. 8. 13. 잠깐의 휴식시간에 LMG(기관총) 병기 손질을 하고 있다

ⓒ2004 NARA




▲ 1950. 8. 13. 박격포 사격 훈련 ⓒ2004 NARA





▲ 1950. 8. 15. 피난민 행렬 ⓒ2004 NARA





▲ 1950. 8. 15. 창녕 남지철교. 국군의 최후 방어선으로 핏빛으로 강물이 물들 만큼 피아 ?稚뺙? 희생을 치렀던 격전의 현장이었다. ⓒ2004 NARA

 



▲ 1950. 8. 24. 모정 무한, 젖을 먹이는 어머니 ⓒ2004 NARA



▲ 1950. 8. 23. 머리에 이고 등에 업고 앞에 붙들고... 고단한 피난 행렬.

ⓒ2004 NARA




▲ 1950. 8. 18. 낙동강 전선에서 쌕쌕들이 폭격을 가하고 있다.

ⓒ2004 NARA




▲ 1950. 8. 25. 폭격에 불타고 기총소사에 죽어가다 ⓒ2004 NARA




▲ 1950. 8. 15. 마산 부근, 피난민들이 배를 기다리고 있다 ⓒ2004 NARA




▲ 1950. 8. 15. 전란으로 폐허가 된 마을 ⓒ2004 NARA

 




▲ 1951. 1. 2. 누가 이 여인을 모르시나요? 부산 임시 포로수용소에서

ⓒ2004 NARA





▲ 1950. 8. 포항 부근의 한 마을이 포화에 불타고 있다 ⓒ2004 NARA





▲ 1950.9. 15. 인천상륙작전을 함상에서 진두 지휘하는 맥아더 장군

ⓒ2004 NARA

 





▲ 1950. 9. 29. 서울 탈환 환영대회 직전의 중앙청 홀, 이승만 대통령 내외와

맥아더 장군 ⓒ2004 NARA





▲ 1950. 9. 29. 유엔 깃발로 펄럭이는 중앙청 광장, 서울 탈환 환영대회가

끝난 직후 바로 옆 건물이 불타고 있다 ⓒ2004 NARA




▲ 1947. 5. 25. 개성 인근의 38선 미군 초소, 그때만 해도 요란한

철조망은 없었다 ⓒ2004 NARA

             

 

                                   
                              아주 귀한 동영상입니다.

 

                     시간을 두고 조금씩 보는게 좋겠습니다.

 


Korean War 01( Trouble on the horizon ) 

 

 

Korean War 02 전쟁은 시작되고

 

 

Korean War 03 부산을 사수하라

 

 

Korean War 04 인천상륙작전

 

 

 

Korean War 05 가자 서울로

 

 

 

 
Korean War 06 38선을 넘어서

 

 

 

 
Korean War 07 중공군의 기습

 

 

 

Korean War 08 얼어붙은 장진호

 

 

 
Korean War 09 다시 남쪽으로

 

 

 
Korean War 10 야전병원의 활약

 

 

 
Korean War 11 전쟁의 균형을 잡아가며

 

 

 
Korean War 12 철의 삼각지대

 

 

 
Korean War 13 평화를 향해

 

 

 
Korean War 14 공습

 

 

 
Korean War 15 전쟁의 막은 내리고

 

 

 

 

   美 워싱톤DC 한국전 기념공원(Korean War Veterans Memorial)

 

복사 http://blog.naver.com/vietvetkorea/50004378405

 

 

미국에 살고있는 전우께서 미국 백악관 근처에 있는 한국전 기념공원

(KoreanWar Veterans Memorial)을 한국의 파월전우들에게

소개하고 싶다고 예전에 말씀하셨는데, 이번에 가셔서 찍은 사진을 www.vietvet.co.kr (월남전과 한국)

운영자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한국전쟁 기념공원 사진을 찍으신 순서대로 편집하여 올립니다.

전우님 고맙습니다.



방문객들을 위한 한국전쟁 메모리얼(Korean War Veterans Memorial)

안내 팜플렛.



몰의 정방형 수로(Reflecting Pool)를 가운데 두고

월남전 메모리얼과 마주한 곳에 한국전 메모리얼이 있다.





미국인들의 애국심은 실로 대단하다.

조국을 위해 전쟁에 나가거나 전사하는 것에 대해

매우 자부심을 느끼는 전통이 있다.

 

 

국가차원에서 이런 애국심을 국민들에게 고양시키려고

노력하는 나라는 그리 많치 않은 것 같다.



한국전쟁 메모리얼에는

625전쟁에 참전한 다국적군의 모습을 하나하나 그린듯한

판초우의를 입은 다소 피곤에 지친 군인들 동상이 대열을 이루며

어디론가 들판을 가로질러 가고 있다.

 

그들을 따라 같이 걸어가며 용감한 우리편이라는 생각에 잠길때

그들앞에는 성조기가 펄럭있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Freedom is not Free" 벽면에 세겨진 이 선언적 문구는

'자유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이면에
'너희가 지금 누리는 자유는 우리가 희생된 결과이다'

라는 우회적 표현이 아닌지 생각하게 만든다.


수많은 관광객이 집중되는 상징적 공간에

그들의 의도된 메시지가 담겨져 있다.





우리의 미합중국은 조국의 부름을 받고
생면부지의 나라, 일면식도 없는 그들의 자유를 지켜주기 위하여

분연히 나섰던 자랑스러운 우리의 아들 딸들에게

깊은 경의를 표합니다. 

 

한국전쟁 1950년~1953년



미국은 한국전쟁 당시

1950.6.25일부터 1953.7.27일까지 한국전쟁에 참전 했으며
54, 246명이 젊은 목숨을 바쳤고 103, 284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아직도 8, 176명의 실종자를 남기고 있다.


6.25 한국전쟁으로 인한 대한민국의 손실은

전사자 415, 004명을 포함하여

총 1, 312, 836 명의 희생자를 냈으며,

 

당시 대한민국이 입은 경제적 손실은

가히 계수로 판단하기 어려운 상태인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고

이렇게 수많은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국전쟁을 마감한 지 반세기가 지났다.
궁핍했던 우리네 살림살이는

이제 가정마다 자가용 한 대 정도는 두고사는 정도로 여유로워졌다.

세계 11위의 경제규모에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가 넘었다.

 

대한민국의 이름 아래 누리는 이 안락한 삶은,

멀리는 반만년 동안 크고작은 전쟁에서 나라를 지켜낸

 참전용사들에게,

가까이는 한국전쟁의 참화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낸

유엔연합국 전몰장병들에게 빚을 진 것이다.





한국전쟁후 반세기가 지났어도 한반도는 총성만 멈춘 준

전시 상태로 남겨져있다.

 

그 반세기동안 남북한은 각각 서로 다른 사회체제가 진행되었고,

남북의 이념적 간극은 벌어질대로 벌어져서 고착화 되었다.

 

현재 북한은 반미와 남조선해방이라는 이데올로기로

대한민국을 위협하고 있고,

 

전세계의 이목은 유일무이한 독재공산체제 북한

압박하고 있는불안한 정세속에 한반도가 있다.

 

남의 집 불구경하듯이 방심을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다.






 

대한민국 국민인 우리는 과연 얼마나 한국전쟁을 이해하고

이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하여 어떤 노력하고 있는지

되돌아 보아야 한다.

 

작금의 평택사태를 보노라면 붉은 세력들이 반미를 부르짖고 있고,

대한민국의 법과 정치환경은 붉은 무리들의 활동을

공개적으로 할 수 있게 만들었고,

경험부족의 정치가들은 북한의 계략에 놀아나고 있다고 보여진다.

 

한미동맹이 절실한 현실에 반미를 부르짖으며

국제사회의 고립을 자초하고 있으니,

제2의 6.25 전초전 같은 불안감이 생긴다.

 

과거의 아픈 역사를 잊으면 그 민족은 멸망하게 된다는 말이 있다.
자유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Freedom is not free).





부상자: 미국 103, 284명 / 연합군 1, 064, 453명



포로: 미국 7, 140명 / 연합군 92, 970명



실종자: 미국 8, 177명 / 연합군 470, 267명



전사자: 미국 54, 246명 / 연합군 628, 833명



 



출처 : 소담 엔카
글쓴이 : 청송암 김기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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