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해외)

르완다 “한국을 롤모델로”… 새아침이 밝았다

청 송 2011. 10. 31. 09:39

1994년 인종학살 딛고 阿화합-번영 상징으로…
허문명 기자 현지 르포

재봉기술 가르치는 한국봉사단원들 1994년 인구 1000만 명 중 10%가 사라진 종족학살을 겪은 르완다가 요즘 아프리카 번영과 인종 화합의 상징으로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고 있다. 경북도와 한국국제협력단이 조성한 ‘르완다 판 새마을 시범마을’ 키가라마에서 재봉기술을 배우는 르완다인들을 한국봉사단원들이 돕고 있다. 키가라마=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아프리카 최빈국(세계 140위) 중 하나인 르완다에는 거지가 없다. 수도 키갈리의 도로는 깨끗하고 교통신호도 잘 지켜진다. 잘 정비된 주택가를 좀 과장되게 말하면 남유럽 어딘가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할 정도다. 하지만 이 나라 전역에는 끔찍한 상흔이 남아 있다.

1994년 100여 일에 걸친 부족 전쟁으로 이 나라에선 100만 명이 숨졌다. 다수 부족 후투족과 소수 부족 투치족의 내전으로 인구 1000만 명 중 10%가 사라진 것이다. 분(分)당 사망자 6.9명, 홀로코스트 때 유대인들이 살해당한 속도의 3배에 이르는,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가장 짧은 시간에 이뤄진 대량 학살이다.

그 후 17년이 흐른 지금 르완다에서는 ‘투치’니 ‘후투’니 하는 말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기다. 끔찍한 학살의 기억에 발목 잡혀 보복의 악순환에 빠져들지 않기 위한 무언의 노력인 것이다.

끔찍한 악몽을 딛고 일어선 결과 요즘 르완다는 아프리카 인종화합과 번영의 상징으로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는 나라로 거듭나고 있다. 제노사이드(한 민족이나 특정 집단을 말살하려는 의도로 자행되는 대량 학살)가 일어난 1994년 이후 2010년까지 글로벌 금융위기가 일어난 2008년을 제외하고 매년 평균 경제성장률이 7∼10%에 이른다. 초등학교 진학률도 90%대에 이르고 한때 6%대였던 에이즈 감염률도 3%대로 떨어졌다. 요즘은 한국을 롤모델로 삼아 ‘정보통신 강국’을 위한 프로젝트를 대통령이 진두지휘하고 있다. 키갈리에 있는 웬만한 호텔이나 관공서에서는 모두 와이파이가 된다.

르완다 재건의 성공에는 상처를 딛고 일어서려는 주민들의 피눈물 나는 노력과 정치적 리더십이 바탕이 되었다. 아프리카 인구밀도 1위인 이 나라에서 학살은 이웃 간에 자행됐다. 학살이 끝난 후에도 피해자와 가해자가 한마을에 사는 일이 흔했다. 내전 후 불특정 가해자를 잡아들이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 결국 자체적인 해결책 ‘가차차’(잔디가 깔린 마당이라는 뜻)를 도입했다. 마을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가해자가 죄를 고백한 뒤 피해자가 용서를 해주면 감옥행 대신에 피해자 집을 지어주거나 마을 도로를 보수하는 사회봉사명령을 받는 것으로 대신하는 것이다. 키갈리 시내의 학살 현장인 기소지 박물관에서 만난 안내원은 “‘가차차’로 원한이나 증오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지만 개인적인 앙갚음은 다시 피를 부른다는 것을 서로 인식하는 계기가 된다. 어차피 살아난 사람들은 다시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되물었다.

이 나라 사람들은 르완다 재건의 일등 공신으로 폴 카가메 대통령(54)을 꼽는다. 3세 때 종족 분규로 우간다로 피신해 난민촌에서 자란 그는 이후 투치족 난민들이 결성한 반군조직 르완다애국전선 총사령관에 올라 1994년 내전을 종식시키고 2003년 신헌법에 따라 첫 직선 대통령이 되었다. 지난해 재선에도 성공해 2017년까지 재임한다.
카가메 대통령이 집권 후 가장 역점을 둔 분야는 치안 안정과 부패 일소. 수도 키갈리에는 어둠이 깔리는 매일 오후 6시만 되면 군인과 경찰들이 거리로 나와 치안을 맡아 11시, 12시에도 여자들이 마음 놓고 다닐 수 있는 아프리카 나라 중 몇 안 되는 안전한 나라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