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해외)

[카다피 42년 독재자의 최후]

청 송 2011. 8. 23. 08:27

 

 

 

카다피의 카멜레온 패션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는 육군 대위였던 청년 시절(맨 왼쪽부터) 쿠데타를 일으키며 42년 독재의 문을 열었다. 그는 독특하고 과감한 패션으로 자신의 철학과 카리스마를 발산했다. 자신의 출신 배경인 베두인 전통의상을 즐겨 입었다. 아프리카국 정상 모임에서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황금색 옷을 둘러‘아프리카 왕 중의 왕’임을 과시했다. 귀마개가 달린 털모자로 야성미도 뽐냈고 선글라스와 카우보이 모자로 독특한 패션감각을 과시했다. 범(汎)아프리카주의와 혁명의 선봉을 자처한 그는 가슴팍에 아프리카대륙과 혁명가들의 사진을 새겨넣은 옷과 제복을 입고 공식 석상에 자주 등장했다. /외신 종합
 2011.10.22 09:30 / 수정 : 2011.10.22 09:59
▲ 나토 연합군은 20일 아침 리비아 시르테에서 대규모 차량이 운집하는 이상 상황을 포착했다. 시르테는 무아마르 카다피 전 리비아 국가원수의 고향이자 최후 거점으로, 미국과 영국 정보기관은 오래전부터 이 지역을 주시하고 있었다

"일요일의 드라이브 같았다" 美도 놀란 트리폴리 장악
반군의 거침없는 공격에 카다피의 '최후의 보루' 카미스여단 순식간에 증발
카다피군 큰 저항없이 항복, 시민들 "리비아는 자유" 환호

우려했던 '최후의 발악'은 없었다. 픽업트럭과 왜건을 탄 리비아 반군은 21일 오후(이하 현지시각) 진격 개시 24시간 만에 별다른 저항 없이 수도 트리폴리에 입성했다. 소규모의 친(親)정부 병력이 무아마르 카다피 국가원수의 요새에서 버티고 있지만, 전세를 뒤집기엔 역부족이다. 로이터통신 등은 반군이 이미 트리폴리의 95%를 장악했다고 보도했다. 뉴욕타임스는 반군의 입성 현장이 마치 "일요일 오후의 한가한 드라이브같다"고 전했다.

시민들 "리비아는 자유다"

지난주 트리폴리 서쪽으로 48㎞ 떨어진 거점도시 자위야를 장악한 반군은 20일 밤 트리폴리로 전격 진군을 감행했다. 당초 자위야 함락 후 최소 2주 정도는 전열을 가다듬을 것으로 예상됐으나 반군은 그 허를 찔렀다. 미국이나 나토(NATO) 지도부조차 깜짝 놀랄 만큼 빠른 전개였다.

반군은 21일 낮 카다피의 7남 카미스(27)가 이끄는 32여단(일명 카미스 여단)과 맞닥뜨렸다. 트리폴리에서 불과 27㎞ 떨어진 곳에 있는 32여단은 수도 외곽을 수호하는 카다피의 최정예 부대다. 그러나 카미스의 행방은 간데없었고, 부대는 짧은 교전 끝에 무력하게 항복했다. 반군은 기지를 접수하고 기지 내 감옥에 갇혀 있던 정치범들을 석방했다. 기세가 오른 반군은 이날 해질 무렵 트리폴리에 다다랐다. 카다피 친위군의 '결사항전'을 예상했던 반군이 맞닥뜨린 것은 반(反)카다피의 상징인 옛 리비아 왕정 깃발을 흔드는 트리폴리 시민들이었다. 수천명이 거리로 나와 "리비아는 자유다" "신은 위대하다"를 외쳤다. 반군은 시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국영 라디오 방송과 상업지구 등 트리폴리의 주요 거점을 모두 장악했다.
 생포됐다던 차남, 한때 도심호텔 등장
무아마르 카다피 국가원수의 차남 사이프 알이슬람이 23일 수도 트리폴리의 릭소스 호텔
 앞에서 지지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AP 연합뉴스

 
짓밟힌 카다피 동상…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 관저가 있는 바브 알아지지야 요새에
진입한 반군들이 23일 요새 안에서 카다피 동상을 부순 뒤 얼굴을 짓밟고 있다. 이날 수백 명
반군은 바브 알아지지야로 진입해 요새를 완전히 장악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AP 연합뉴스
 

 

[카다피 요새 함락]카다피 고향서 최후의 결전… 반군 “48시간 안에 끝낸다” 

 

 

리비아의 반(反)카다피군은 21일 트리폴리에 입성한 후 무아마르 카다피 국가원수의 관저가 있는 밥알아지지아 요새 500m 앞까지 진격했다. 카다피 측의 격렬한 저항으로 장기전이 될지도 모른다는 관측이 나왔으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군의 공군력과 반군의 기세 앞에 카다피의 철옹성은 힘을 쓰지 못하고 무너졌다. 반군은 23일 공격을 시작한 지 불과 5시간 만에 42년 철권통치의 상징인 요새를 함락했다.

○ 결정적 장면

‘카다피의 펜타곤’으로 비유되는 밥알아지지아 요새는 카디피군 최후의 보루라는 명성에 걸맞게 견고했다. ‘요새 함락 전투’는 초기에는 흡사 중세 공성(攻城)전을 연상케 했다. 두께 0.9m, 높이 3.7m의 견고한 콘크리트벽 뒤에 몸을 숨긴 카다피군은 탱크포 등 강력한 무기를 앞세워 반군의 진격을 가로막았다. 박격포와 기관총으로 무장한 반군은 쉽게 요새를 점령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토의 폭격기가 서쪽 벽을 무너뜨리자 이날 오후 3시경 반군 수백 명이 한꺼번에 요새 안으로 몰려 들어갔다. 이로부터 불과 2시간 남짓 지난 오후 5시 15분 요새에 반군 깃발이 올라갔다고 영국 텔레그래프가 보도했다.

반군은 벙커와 터널 등을 말 그대로 ‘이 잡듯’ 뒤졌지만 카다피를 찾을 수 없었다. 생포된 카다피 호위병이 반군에게 총 개머리판과 발로 마구 구타당하는 장면이 알자지라 카메라에 잡혔다. 카다피 동상이 있던 지점에는 머리에 총을 맞은 시신이 담요에 대충 싸여 방치돼 있는 등 여기저기서 카다피군 시신이 목격됐다.

무스타파 압둘 잘릴 과도국가위원회(NTC) 위원장은 요새 함락 직후 “21일 트리폴리 입성 후 사흘간의 전투로 400여 명의 카다피군이 전사하고, 2000여 명이 다쳤으며 600여 명이 생포됐다”고 밝혔다. 요새 안에서는 카다피군이 급히 도망가면서 버리고 간 무기도 대량으로 발견됐다. 흰색 건물 두 채에서 권총과 소총 기관총 등이 무더기로 나왔으며 수천 정은 포장도 뜯지 않은 상태였다.

○ 마지막 격전지 ‘수르트’
밥알아지지아 요새 함락에도 불구하고 카다피 원수는 자신감을 잃지 않고 있다. 그는 23일 요새 함락 수시간 뒤 친카다피 성향의 알라이TV에서 “나는 트리폴리에 있다”고 밝히고 반군을 “쥐새끼들” “악마”로 지칭하며 주민들에게 반군들을 “쓸어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흡사 승자와 패자의 표정이 뒤바뀐 듯한 형국이다.

그가 거점을 내주고도 호기를 부리는 이유는 반군에 잡히지 않고 은신생활을 지속하며 시간을 번 뒤 다시 세력을 규합해 후일을 도모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에 호응하듯 트리폴리에서는 여전히 카다피군이 활개치고 있다. 트리폴리에 들어간 외신기자 대다수는 수도 한복판 릭소스 호텔에서 요새 함락 하루 뒤인 24일까지 카다피 친위대에 억류되었다가 풀려났다. 호텔 입구를 막고 있는 카다피군의 저항에 반군의 진입 시도는 번번이 좌절됐다. 요새 안에 있던 반군도 카다피 지지자들의 소행으로 보이는 저격과 포탄 공격을 받고 있다. 정치범들이 수감돼 있는 악명 높은 아부살림 교도소는 24일까지 정부군 통제하에 있으며 공항으로 가는 도로는 카다피군 저격수에 의해 봉쇄됐다. 리비아 국민도 카다피의 광기 어린 육성연설을 듣고 카다피가 보복을 위해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다고 영국 BBC방송이 보도했다. 이날 트리폴리에서는 카다피군이 정수처리장에 독극물을 살포했다는 소문이 돌아 주민들이 수도꼭지를 잠그고 물을 마시지 못하며 공포에 떨기도 했다.

반군에 밀린 카다피군 주력은 수르트로 이동해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고 있다고 외신은 전했다. 수르트는 트리폴리 동쪽 373km, 반군 거점인 벵가지에서 서쪽으로 344km 떨어진 리비아 중심부의 지중해 연안도시로 인구 15만 명의 대다수가 카다피가 부족장인 카다파 부족이다.

수르트가 리비아 사태의 최후 격전지가 될 개연성이 큰 가운데 도시에선 어린아이들까지 무기를 들고 최후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다고 외신은 전했다. 한편 반군도 무력을 수르트로 이동시켜 결전을 벼르고 있다. 벵가지에서도 지원군이 이 도시로 출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군 측은 수르트를 48시간 안에 점령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실제 현실화될지는 미지수이다.

○ 대량살상무기 우려 증폭


리비아 사태가 반군의 승리로 굳어져 가는 가운데 미국과 유럽의 정보기관들은 리비아에 있는 화학무기와 재래식 대량살상무기의 행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카다피군이 화학무기를 사용해 최후의 항전을 하거나 알카에다 등 테러조직이 이 무기를 입수할 여지를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리비아에는 겨자가스와 스커드미사일, 대전차로켓 등 재래식 무기와 핵 원료 물질 등이 상당량 비축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중 화학무기는 노후화돼 심각한 군사적 위기가 아니라고 평가되지만 그래도 여전히 불특정 다수에게 심각한 위해를 입힐 수 있다. 리비아에 240여 기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스커드미사일도 우려되는 대량살상무기다. 카다피군은 22일 수르트에서 스커드미사일 3발을 반군이 장악한 도시에 쏘았다. 이 밖에 대량살상무기를 장악한 테러조직원들이 유럽을 상대로 보복 행위를 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카다피 은신했던 관저 지하터널은 한국産 대수로" ―英 일간지 텔레그래프

NYT는 "카다피, 김일성 책 읽고 지하 터널 착안했다"
"카다피, 수로 건설 명령은 서방 위협서 보호 목적 있어, 75t짜리 강화 콘크리트 사용… 위성감시나 적 공습서 피해 美 정보기관도 의심해 왔다"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가 반군의 공격을 피해 관저인 바브 알아지지야를 탈출할 때 지하터널을 이용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제기되는 가운데 카다피가 1980년대 만든 관개 수로(irrigation tunnels)를 활용해 서방의 위협을 피하려 했다고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가 22일 보도했다. 텔레그래프는 카다피가 수로 건설을 명령한 것은 물 공급 용도뿐 아니라 서방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전했다. 또 카다피는 피신에 사용한 비밀 터널 아이디어를 북한 김일성의 책을 읽고 얻었다고 뉴욕타임스(NYT)가 과거 보도에서 전했다



 

  우리나라 건설 기술자들이 1999년 리비아 대수로 공사 현장에서 대형 콘크리트 송수관을 연결하고 있다. 이 공사는 리비아 남부 사하라 사막의 지하수를 끌어와 물이 부족한 북부 도시에 공급하기 위한 대형 프로젝트다. 외신들은 무아마르 카다피 국가원수가 이 수로 중 일부를 군사적 목적으로 전용했다고 보도했지만, 동아건설 관계자는 대수로 전용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밝혔다. /게티이미지 멀티비츠

카다피 가족 알제리행… 카다피 행방묘연

"카다피 가족, 알제리에 도착"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의 부인과 두 아들, 딸이 29일 알제리에 입국했다고 알제리 외교부가 밝혔다.
외교부는 성명에서 “카다피의 아내 사피야와 그의 딸 아이샤, 두 아들인 무하메드와 한니발이 알제리-리비아 국경을 통해 이날 오전 8시 45분 알제리로 들어왔다”고 밝혔다고 현지 뉴스통신사인 APS가 보도했다.
하지만 이 통신은 카다피의 소재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알제리 외교부도 카다피 가족이 알제리로 넘어온 사실을 확인했다.
이런 가운데 이탈리아 뉴스 통신사인 ANSA는 권위있는 리비아 외교소식통을 인용해 카다피와 그의 두 아들인 사아디, 세이프 알-이슬람이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 남쪽 바니 왈리드에 머물고 있다고 보도했다.
ANSA통신은 그러면서 카다피의 부인과 자녀 3명이 알제리로 넘어갔다고도 전했다.
하지만 카다피의 다른 아들인 카미스는 트리폴리에서 바니 왈리드로 가던 중에 사망한 것이 확실시된다고 이 통신은 밝혔다.
리비아의 반군 지도부도 그간 수차례 사망설이 나돌았던 카미스가 트리폴리 남동부 타르우나시에서 반군의 공격을 받아 숨졌을 수도 있다며 그의 사망설에 무게를 실었다.
바니 왈리드는 트리폴리에서 동남쪽으로 100㎞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42년 독재자의 최후] 미녀 경호원 40여명 두고… 황금관에 황금지팡이 들어

입력 : 2011.10.21 03:28 / 수정 : 2011.10.21 05:53

여성 경호원들 곁에 두고 카다피가 2010년 8월 이탈리아 로마 인근 공항에 도착해 군복 차림의 여성경호원들과 함께 비행기 트랩을 걸어 내려오고 있다. /AP

카다피의 기행 - 선글라스 끼는 이유 묻자 "내 미래가 너무 밝아서…"

무아마르 카다피는 42년간 집권하며 국제사회에서 갖가지 기행(奇行)으로 화제를 낳았다.

그는 2009년 처음으로 유엔 총회 참석을 위해 미국 뉴욕을 방문했을 때 맨해튼 센트럴파크에 베두인(사막 유목민)처럼 텐트를 설치해 숙소로 쓰려다 거절당했다. 집권 기간 최소 5차례 암살 위협을 넘긴 카다피는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잠을 자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자주 베두인 텐트에서 기거하고 40여명의 미녀 경호원이 그의 신변을 지켰다. 그가 여행할 때는 미모의 우크라이나 출신 간호사가 수행했다.

그의 특이한 패션 감각도 화제였다. 2006년 아프리카연합 정상회의에선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보라색 의상을 입었고, 2008년 트리폴리에서 열린 행사에선 '아프리카 왕 중의 왕'답게 황금관을 쓰고 황금 지팡이를 마련했다. 평소 명품 루이비통 선글라스를 즐겨 쓰는 데 대해 카다피는 "내 미래는 너무 밝아서 가리개가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2007년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회담할 때는 계속 파리채를 휘둘러댔다. 백악관은 지난 4월 카다피가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를 공개했다. 편지에서 카다피는 "공습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계 후손인) 당신은 자랑스러운 우리의 아들"이라며 "다음 대통령 선거에서도 승리하길 바란다"고 썼다. 콘돌리자 라이스 전 미국 국무장관에 대한 '짝사랑'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2007년 알자지라와 인터뷰에서 라이스를 언급하며 "마이 달링 리자, 리자, 리자, 나는 그녀를 아주 사랑한다"고 했다.

그는 2008년 '범아프리카주의'를 선언하면서 "리비아 남자들은 흑인 여자와 결혼하고, 리비아 여자들은 흑인 남자와 결혼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한편 리비아 반군 대표기구인 국가과도위원회(NTC)의 무스타파 압델-자릴 위원장은 카다피에 대한 국제사회의 조치가 느슨해질 경우 그가 리비아 뿐만 아니라 세계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이날 리비아 군사조치에 참여한 국가 대표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같이 강조하며 그것이 우리가 지속적인 협조를 요구하는 이유라고 강조했다

 

 42년 독재자의 최후] 카다피 최후의 날, 넷째 아들도 사망

  • 입력 : 2011.10.21 03:29

[자녀들은 어떻게 됐나]
7남 1녀 중 셋 사망, 셋 망명… 나머지 2명은 행방 불명

무아마르 카다피 전 리비아 국가원수가 8개월의 내전 끝에 사망한 가운데 나머지 가족들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카다피에게는 부인 사피아와 7남 1녀가 있다. 이 중 일부는 이웃 국가로 도피했거나 이미 시민군과의 전투나 나토(NATO)군의 공습으로 사망했다.

우선 넷째 아들 무타심도 20일 시르테에서 시민군에 의해 사살된 것으로 전해졌다. 카다피의 처남이자 군 정보국장 압둘라 알사누시는 시민군 손에 잡혔다고 리비아 국영방송이 보도했다. 무타심은 카다피의 후계자로 거론됐었고 알사누시 역시 카다피의 오른팔로 통했던 인물이다.

부인 사피아는 딸 아이샤, 장남 무함마드와 다섯째 아들 한니발을 데리고 지난 8월 29일 알제리로 도피한 것으로 전해졌다. 알제리가 아닌 제3국으로 갔을 수도 있지만 당시 아이샤가 출산을 앞두고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아직 알제리에 머물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카다피의 가장 유력한 후계자였던 차남 사이프 알이슬람과 축구선수 출신 셋째 아들 알사디는 리비아에 은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의 행방은 아직 묘연하다. 여섯째 아들 사이프 알아랍은 지난 6월 나토군 공습으로 사망했다. 특수여단을 이끌던 일곱째 아들 카미스 역시 지난 8월 트리폴리 함락 과정에서 시민군과 교전을 벌이다 사망했다. 이밖에 카다피에게는 입양한 딸 '한나'가 있었지만 생후 6개월이던 1986년 미군의 트리폴리 공습으로 사망한 것으로 전해졌다.

 

"쏘지마"… 고향(리비아의 시르테) 배수관서 최후

  • 입력 : 2011.10.21 03:32

카다피, 머리엔 총상 손엔 황금총… 리비아 과도委 "시민군이 사살"

무아마르 카다피(69) 전 리비아 국가원수가 자신의 고향이자 최후 거점인 시르테에서 살해됐다고 AFP통신이 20일 리비아 국가과도위원회(NTC) 관계자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NTC 대변인은 "카다피가 시민군에 의해 살해됐음을 세계에 선포한다. 카다피가 최후를 맞은 지금은 전제정치와 독재를 종식한 역사적 순간이다"고 밝혔다. 로이터통신은 카다피가 시민군에 의해 사살됐다고 전했다. 시민군들은 카다피가 머리에 총상을 입어 사망한 것처럼 보이는 모습을 휴대전화 동영상과 사진으로 촬영해 유포했다.

무아마르 카다피 전 리비아 국가원수가 자신의 고향인 시르테에서 20일 심각한 부상을 입고 피를 흘리고 있는 모습이 시민군의 휴대전화 카메라에 찍혔다. 카다피는 체포 당시 카키색 군복을 입고 터번을 두른 채 두 다리를 심하게 다쳤고 머리에도 총상을 입어 피투성이 상태였다고 리비아 국가과도위원회 관계자는 밝혔다.(피투성이 사진은 게재하기에 부적절하다고 판단, 흑백 처리 했습니다) /로이터 뉴시스

NTC측은 카다피를 체포했으며, 카다피가 체포 당시 황금으로 만든 권총을 든 채 카키색 군복과 터번 차림으로 두 다리에 총을 맞아 심하게 다친 상태였다고 밝혔다. 그는 배수관에 숨어 있다가 자신을 향해 접근하는 시민군을 향해 "쏘지마! 쏘지마!"를 외쳤다고 시민군이 전했다.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전 국가원수가 체포된 장소로 추정되는 콘크리트 구멍. /AFP 연합뉴스

카다피는 1969년 9월 쿠데타 성공 이후 리비아를 42년간 철권 통치했다. 반(反)카다피 시민군은 중동·북아프리카 민주화 시위에 힘을 얻어 지난 2월 정권 퇴진운동을 시작했고 지난 8월 트리폴리를 함락시켜 사실상 카다피를 권좌에서 몰아냈다. 카다피는 이후에도 은신 상태에서 저항을 계속했다. 카다피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본부를 둔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의해 반(反)인도주의 혐의로 기소돼 있다.

NTC측은 이날 카다피 체포 전 시르테를 장악했다고 밝혔다. 시르테 시민 10만여명은 시민군과 친위군의 격전이 계속되자 대부분 도시를 떠난 상태였다. 응급 의료진은 카디피 친위군들이 시르테에서 격렬히 저항했고 카디피 정권에서 국방부 장관을 지낸 아부 바크르 유니스가 최후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전했다

[42년 독재자의 최후] 나토 무인기가 카다피車 공격… 車 버리고 숨자 시민군이 에워싸

입력 : 2011.10.21 03:29

[카다피 최후의 순간]
"카다피 살해 바란다" 클린턴 발언 이틀 만에…
군복입고 터번 두른채 도피, 발각 당시 두 다리에 큰 부상… 외신들 '피범벅' 동영상 방영
리비아 국민들 "그가 죽었다" 거리마다 쏟아져 나와 환호

42년간 리비아를 철권 통치했던 카다피는 20일 리비아 시민군에 의해 발각될 당시 배수관 속에 숨은 채 "쏘지마! 쏘지마!"를 외쳤다고 현장에 있었던 시민군 병사가 전했다. 당시 카다피는 혼자였고 카키색 군복을 입고 머리에 터번을 쓴 상태였던 것으로 전해졌다.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와 시민군에 따르면 나토군은 이날 오전 카다피 친위군 차량 2대를 시르테 근교에서 공습했다. 카다피는 공습을 받아 이미 머리와 다리를 다친 상태에서 차량에서 빠져나와 배수관으로 숨어들었다. 시민군은 카다피가 숨어 있는 곳을 둘러싼 채 포위망을 점차 좁혀 접근하다가 카다피의 머리와 심장 쪽에 총격을 가해 살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BBC방송은 카다피가 시민군의 총격을 받아 응급차로 옮겨지던 중 사망했다고 전했으나 일부 외신은 그가 생포된 뒤 부상이 악화돼 숨졌다고 전했다.

“카다피가 들고있던 황금권총” 리비아 시민군들이 20일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전 국가원수가 소유했던 금 장식 총을 들어보이고 있다. 시민군은 이 총을 카다피가 체포된 장소에서 획득했다고 밝혔다. /AFP 연합뉴스
카다피의 최후를 목격한 시민군은 그가 황금으로 만든 권총을 들고 있었고, 자신이 봤을 때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고 증언했다. BBC·CNN방송은 카다피가 머리에 총상을 입고 피범벅이 돼 쓰러진 채 시민군들에 의해 옮겨지는 동영상을 방영했다. 시민군이 휴대전화로 촬영·유포한 이 동영상으로 미뤄 카다피가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고 AFP통신은 추정했다.

카다피의 사망 소식에 리비아 국민은 환호했다. 트리폴리·미스라타·벵가지에서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승리를 자축했다.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지난 18일 리비아를 전격 방문해 "미국은 카다피가 생포되거나 살해되기를 바란다"고 말해 나토군의 '살해'를 용인한 듯한 발언을 했다. 그간 "카다피는 정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란 식의 우회적 표현을 접은 직설적인 어조였다.

시민군은 이날 카다피의 고향이자 최후 거점 시르테를 완전히 장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앞서 카다피 친위군을 태운 차량 40대가 시르테 서쪽으로 도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카다피는 지난 8월 23일 시민군의 트리폴리 장악을 계기로 축출됐지만 이후에도 모습을 감춘 채 '결사 항전' 의지를 공표했다.

 

[42년 독재자의 최후] 세계의 장기 독재자 이제 3명 남아

왼쪽부터 김정일, 알아사드(시리아), 살레(예멘)
무아마르 카다피 사망으로 이제 남아 있는 장기집권 독재자는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 예멘의 알리 압둘라 살레 대통령,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 등 3명이라는 말이 나온다.

알아사드 대통령은 30년 집권한 아버지 하페즈 알아사드 대통령에 이어 11년째 집권하고 있다. 지난 3월 중순부터 발생한 반정부 시위를 폭력 진압해 3000명 이상이 사망했다. 33년 집권 독재자 살레 대통령은 계속되는 국민의 시위 등 국내외의 퇴진 압력을 받고 있으나 버티고 있다.

김일성에 이어 북한을 통치하고 있는 김정일은 아들 김정은에게 3대째 권력을 이양하려고 하는 중이다.

 

 

리비아 과도위 관계자 "17세 소년이 황금권총 빼앗아 쏴"

  • 입력 : 2011.10.24 03:01 / 수정 : 2011.10.24 08:15
20일 시민군이 빼앗은 카다피의 황금 권총. /AFP 연합뉴스

황금권총 과시하던 카다피, 그 총에 자신이 죽을 줄은…

리비아의 17세 소년이 무아마르 카다피에게 빼앗은 황금 권총으로 그를 쏘아 죽였다고 영국 데일리메일이 22일 국가과도위원회(NTC) 관계자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이 주장이 맞는다면 카다피는 생전에 그토록 아꼈던 황금으로 된 자기 권총으로 최후를 맞은 것이다.

NTC 관계자는 "카다피를 죽인 소년의 신분을 확인했지만 미성년자여서 법정 소환하지 않겠다. 소년은 영웅이고 신변을 보호하겠다"고 말했다.

시르테에서 지난 20일 탈출 도중 사망한 카다피의 최후 상황은 명확하지 않다. 카다피 체포 당시 촬영한 새로운 사진과 동영상도 속속 나오고 있다.

23일 공개된 2분 28초 분량의 동영상은 배수관에 숨어 있던 카다피가 시민군에게 체포된 장면부터 촬영돼 있다. 동영상에서 카다피는 머리와 목, 왼쪽 어깨의 젖은 피를 닦아내며 "무슨 짓인가. 너희의 행동은 이슬람 율법에 어긋나며 금지돼 있다. 이게 옳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말했다. 하지만 젊은 시민군은 "무아마르, 개자식"이라고 외친 뒤 잠시 후 카다피의 신발을 들고 "승리"를 연호했다. 일부 시민군은 그 신발로 카다피를 때렸다.이슬람 사회에서 신발로 때리는 행위는 모욕의 상징이다. 동영상에는 나오지 않지만 시민군의 총구가 카다피의 배와 머리로 향하는 장면이 찍힌 사진도 공개됐다.

카다피의 목숨을 끊은 치명상에 대해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검시에 참여한 리비아 법의학자 알진타니는 23일 "카다피는 머리 부위 총상으로 사망했다"고 밝혔다고 CNN이 보도했다. 하지만 다른 부검의는 "내장을 관통한 총상이 사망의 직접 원인이며 머리 총상은 이후 발생했다"고 전날 말했다.

한편 카다피 체포·사살 작전에 영국 특수부대 공수특전단(SAS)이 개입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텔레그래프가 23일 보도했다. 캐머런 총리의 명령으로 SAS가 리비아 시민군과 공조하면서 카다피를 추적하고 구체적인 작전을 조언했다는 것이다